국어사전에 오른 아재의 뜻은 짧고 명료하다. ‘아저씨의 낮춤말.’ 주로 중년 남성을 예사롭게 부르는 이 말엔 10년 전만 해도 꽤나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2016년 한국사회에서 아재는 상반된 뉘앙스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대중문화 분야의 유행어 ‘아재파탈’ ‘아재개그’ 등을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아저씨한테서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농담 코드를 받아들인다. 심지어 20대 초반 걸그룹 여성이 스스로를 “아재스럽다”고 칭하며 털털하고 편안한 성격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를 보면 이런 성향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조사 전문업체 ‘엠브레인’과 최근 2일간 1000명에게 모바일 설문을 벌인 결과, ‘아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촌스럽다”(35.5%)와 “다정하다”(27.2%)가 “답답하다”(9.8%)나 “권위적이다”(8.9%)보다 3배가량 높았다. 다소 시대에 뒤떨어지는 면이 있어도, 아재 하면 소통에 취약한 ‘꼰대’를 떠올리던 과거와 달리 긍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바뀐 것은 이미지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대 아재들은 ‘외모’부터 달라졌다. 엠브레인 설문조사에서도 43.9%가 ‘요즘 아재들은 과거보다 미용이나 패션에 훨씬 신경을 많이 쓴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28%에 그쳤다.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지금 아재들은 소비문화가 절정이던 1980,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다 보니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사회 문화적 주체로 활동한다”고 분석했다.
● 오빠보다 더 멋진 아저씨… ‘아재파탈’ 매력에 열광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재우 씨(47)는 최근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큰누나네 조카가 자신을 자꾸만 ‘아재’라고 불렀기 때문. 서울 출신이라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몇 번 웃어넘기다가 결국 기분이 상해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랬더니 중학생인 조카는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삼촌, 뭘 모르시네. ‘아재’는 좋은 뜻이에요. 요새는 멋진 아저씨를 아재라 불러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아재는 이제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니다. 최근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 크다. 옛날 같으면 ‘꽃미모’가 아니라서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중년 연예인들이 ‘소년보다 아재’라 불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생활로도 확장됐다. 엠브레인 설문조사에서 34.2%가 “주위에 ‘아재파탈’이라 부를 만한 중년 남성이 많이 늘었다”고 응답했다.
2016년 한국은 왜 아재에 열광하고 있을까. 진짜 우리 사회의 아재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온 것일까. 대중문화와 SNS에서 촉발된 아재 열풍
전문가들은 최근 아재 신드롬은 주로 대중문화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이전에도 온·오프라인에서 아재란 표현을 써 왔지만, 아재와 옴파탈(치명적 매력을 가진 남성)이 결합한 아재파탈이란 신조어가 등장하며 폭발력을 얻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올해 1∼3월 방영했던 tvN 드라마 ‘시그널’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은 아재파탈의 ‘원조국밥’에 해당한다.
기존 한국 드라마 속 남성 주인공은 주로 탁월한 외양을 기본으로 근사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우위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조진웅이 연기한 형사 이재한은 비교적 평범한 외모에 인간적이면서도 불의에 맞설 줄 아는 캐릭터였다. 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40대 조연 이미지가 컸던 그가 화려한 스타성에 기대지 않고 단단한 연기력과 친근함만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단 뜻에서 아재파탈이란 찬사가 뒤따랐다”고 말했다.
이후 아재파탈은 광범위하게 회자됐다. 울퉁불퉁 근육질 몸매와 달리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마동석,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까칠하지만 잔정을 드러낸 배우 이서진 등에게도 ‘아재파탈’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이렇다 보니 유행에 기대 여기저기 갖다 쓰는 ‘범람’ 현상까지 보인다. 다양한 주제로 연예인 순위를 매기는 tvN 예능 ‘명단공개 2016’은 5월 ‘오빠보다 매력 터지는 아재파탈 스타’에서 배우 정우성이나 에릭도 아재로 뽑았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초기 아재파탈은 진짜 아저씨이면서 매력 있는 이를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최근엔 기존 꽃미남까지 나이만 좀 있으면 다 아재파탈로 엮는 ‘남용’이 생겨났다”고 했다.
아재파탈과 함께 아재 열풍을 이끈 또 하나의 키워드는 ‘아재개그’다. 원래 아재개그는 흔히 ‘쌍팔년도 개그’라 불렀던 철 지난 언어 유희를 가리켰다. ‘늘 배고픈 나라는 헝가리’, ‘제일 오래된 다리는 구닥다리’라는 식이다. 주로 중년 아저씨들이 즐기는 말장난이 재미없고 고루하단 비하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만나며 아재개그는 ‘환골탈태’의 상황을 맞았다. 호흡이 긴 문장보단 짤막한 글을 선호하는 SNS에서 간단명료한 말장난은 궁합이 잘 맞는 놀이였다.
이는 아재 연예인의 개그도 새로이 조명받는 밑거름이 됐다. 대표적 사례가 가수 김흥국이다. 사실 그는 오랜 세월 비슷한 어투로 농담만 반복하는 막무가내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개그맨 조세호에게 던진 “안재욱 결혼식 때 왜 안 갔어” 한마디로 ‘흥궈신(흥국+예능 신)’이란 애칭까지 얻었다. 사실 이 ‘맥락 없는’ 대화는 지난해 벌어진 일이지만, 온라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소비되며 화제를 모았다. 이번 엠브레인 조사 ‘아재 하면 떠오르는 연예인’ 질문에서도 김흥국이 50.8%의 지지를 얻으며 조진웅(19.7%) 마동석(11.5%)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기성세대 풍자 강하지만 소통의 기회 될 수도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아재 홀릭(holic)’은 어떤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일단 아재의 ‘쪽수’가 확연하게 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행정자치부와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5년 40, 50대 남성은 870만여 명. 417만 명을 살짝 웃돌던 1990년보다 453만 명이 늘어,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남성 전체 인구는 1990년 2178만 명에서 2015년 2576만 명으로 398만 명밖에 늘지 않았다. 다른 연령대가 비슷한 수치를 유지하는 동안 ‘아재’들이 잔뜩 불어난 셈이다.
아재의 양적 확산은 같은 연령대 여성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40, 50대 여성인 ‘아줌마’는 1990년 478만 명에서 2015년 848만 명으로 370만 명 정도가 늘어났다. 25년 동안 아재가 아줌마보다 84만 명이 더 많아진 것이다. 1990년엔 아줌마가 아재보다 61만 명이 많았는데, 2015년엔 오히려 아재가 아줌마보다 22만 명이나 더 많아졌다.
인구 증가에 비례해 사회적 영향력도 자연스레 커졌다. 2012년 대선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50대 투표였다. 예전 같으면 대중문화에서 주류에서 밀려났던 40, 50대가 지금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대중문화는 과거엔 10, 20대를 주류로 보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젠 다양한 계층이 목소리를 내는 시대”라며 “현재의 중년은 TV와 영화, 가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주류 소비층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대중문화에서 변방으로 취급됐던 아재의 목소리가 커질 환경이 조성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우리 사회에서 아재의 위상까지 올려놓았다고 보긴 아직 힘들다. 아재파탈, 아재개그와 비슷한 시기에 크게 유행한 ‘개저씨’란 신조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주로 약자에게 ‘갑질’ 하는 중년 남성을 뜻하는 이 말은 우리 사회가 아재를 ‘꼰대’로 보는 시각 또한 여전함을 짐작게 한다. 실제로 엠브레인 조사에서도 ‘아재가 지닌 단점’(복수 응답)에 대해 ‘시대에 뒤처진다’(64.0%)와 함께 ‘소통이 부족하다’(55.8%) ‘고집이 세다’(44.4%) ‘자기 중심적이다’(33.2%)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 사회학자는 “현재 아재 코드는 존경보단 기성세대에 대한 풍자의 의미가 강해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TV나 인터넷에서 아재에 주목하는 이유도 지금 이 순간 ‘상품 가치’가 높기 때문일 뿐이란 의견도 있다. 아재의 사회적 인식 변화에 반응한 게 아니라 대세를 좇았단 얘기다. 실제로 파일럿으로 화제를 모은 뒤 26일부터 정규 편성된 SBS ‘다시 쓰는 육아일기! 미운 우리 새끼’나 순간 최고 시청률이 7%를 넘으며 화제몰이 중인 채널A ‘아빠본색’을 보면 대중문화가 아재를 소비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 준다. 김흥국 김구라 김건모 등 아재 연예인들은 최신 트렌드에 익숙하지 않고, 헛헛한 농담을 즐기며,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 예능 PD는 “요즘 아재 소재의 유행은 단발성 화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며 “물의를 일으키는 아재 연예인이 나오거나 중년 남성과 관련된 사회적 논란이 생기는 순간 거품은 그대로 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풍조가 어려웠던 세대 간의 소통 창구를 마련할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카에게 아재라 불렸던 김재우 씨는 “오해가 풀린 뒤 옛날에 유행했던 말장난을 몇 개 들려줬더니 조카가 엄청 좋아했다”며 “왠지 모를 공감대를 형성한 기분이었다”고 귀띔했다. 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아재 문화가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쩌면 아재 신드롬은 의도했건 아니건 누군가가 다른 세대에게 내민 손일 수도 있다. 그걸 굳이 내칠 까닭은 딱히 없지 않나.
‘나는 아재 마흔 넘은 아재/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지만/걱정은 No 나만 믿어 봐/한 번만 털어주면 다 쓰러지니까… 내가 부끄럽니/내가 실수했니/나는 너희가 좋아/우리랑 계속 놀아 주라.’ (그룹 노라조의 노래 ‘아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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