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 때문에?” 1인의 극단 선택, 주변 28명까지 후유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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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자살의 전염 고리 끊어라]
마음속 깊이 새겨진 ‘아픔’
가족의 자살 목격한 사람들, 가정불화-우울증 가능성 높아 힘든일 겪으면 ‘잘못된 선택’ 이끌려
제3자에도 번지는 트라우마
청소년 학습경향 강해 더 위험…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 느끼기도
경찰-소방관들도 심리적 충격 커

정태섭(가명·31) 씨 가족의 비극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했다. 5형제 가운데 장남이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농약을 들이켰다. 정 씨의 아버지가 열 살 남짓일 때였다. 극단적 선택은 이후 4명의 작은할아버지들에게 번졌다. 거짓말 같은 일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 자살의 ‘심리적 전염’

비극의 유산은 대(代)를 건너뛰었다. 정 씨의 친척 동생은 중학교 1학년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6년 뒤인 2005년 정 씨의 누나마저 생일을 이틀 앞두고 대학 졸업식이 열리던 어느 겨울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마음속에 분노를 쌓아온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 분위기는 늘 답답하고 폭력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 씨가 의지해온 연년생 누나가 대학생활에 어려움을 겪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한 집안에 7명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자살은 대물림되고 전염된다. 한 사람이 자살했을 때 영향력이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차단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임재호 교수는 “자살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나 탈출구로 받아들인다”며 “삶의 짐이나 힘든 일이 생길 때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당장은 고통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가정불화나 우울증 같은 심신의 병이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형이 연쇄적으로 자살했던 한 40대 남성은 “나이를 먹었는데도 삶이 힘들 때면 두 사람 생각이 나서 괴롭다”며 상담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중앙심리부검센터 고선규 부센터장은 “자살이 한 번 일어나면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부터 주변 동료, 나아가 제3자까지 단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며 “거꾸로 말하면 한 사람의 죽음을 막으면 그만큼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직격탄을 맞는 것은 대부분 유가족이다. 그렇지만 고인의 연인 등 혈연보다 더 끈끈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가장 가까운 나조차도 힘들 때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기 때문이다.

A 씨(34)는 4년간 사귄 여자친구의 자살을 목격한 뒤 감정적 상처를 입고 자살을 시도했다.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형제는 자주 A 씨를 폭행했다. 의지할 가족이 없던 그는 여자친구를 만나 비로소 안정감과 애착을 느꼈다. 하지만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떠나자 A 씨는 “누구도 내곁을 지켜주지 않는데 살아서 뭐 하냐”는 절망에 빠진 끝에 결국 지난해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A 씨는 퇴원한 뒤에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B 씨(51·여)는 2014년 대학생 딸이 자살한 지 일주일 만에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 B 씨는 그 직전 상담기관에 전화해 “서로 의지하며 살던 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다 끊었다. 당시 전화를 받았던 사회복지사는 B 씨가 일주일 동안 연락을 하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되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건 B 씨가 아닌 경찰이었다. 이웃의 신고로 B 씨의 집에 들어왔는데 이미 자살한 뒤여서 조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 지인, 제3자도 트라우마 겪어

누나 등 가족 7명을 자살로 잃은 정태섭(가명) 씨가 2일 경기 의정부시의 한 카페에서 가족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의정부=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누나 등 가족 7명을 자살로 잃은 정태섭(가명) 씨가 2일 경기 의정부시의 한 카페에서 가족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의정부=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친구나 직장 동료, 먼 친척 등 주변의 지인들 역시 크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직장 내 업무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살을 한 경우에는 동료나 선후배들도 자신이 질책하거나 핀잔을 주는 등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40대 공무원 이모 씨는 2013년 관사 바로 아래층에 살던 친한 후배가 목을 매 자살한 모습을 본 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후배가 살던 빈집을 지나며 불안과 두려움, 자책감에 시달렸다. 평소 사교성이 좋고 자부심이 넘쳤지만 사고 이후 급격히 말수가 줄었고 불면에 시달렸다. 전과 달리 자녀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몇 달간 상담치료를 받은 뒤에야 이 씨는 불면증과 감정 기복 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자살 경험을 학습하려는 경향이 강한 청소년들은 더욱 위험하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C 양(19)은 친구 D 양을 따라 자살했다. 그들은 서로의 힘든 가정사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우울증을 앓던 D 양의 오빠는 어느 날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투신자살했다.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던 D 양까지 그로부터 4개월 만에 투신하자 C 양은 친구의 사진을 끌어안고 울며 식사도 거의 못했다. 평소 친했던 두 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C 양은 결국 2014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경찰·소방공무원과 같은 제3자들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자주 노출된다. 사고 현장을 직접 보고,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고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심리적인 불안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백모 씨(51)는 참혹한 사고 현장을 자주 목격하는 경찰 과학수사대에서만 20여 년 일하며 가슴 통증 등 공황장애를 겪다 경찰 트라우마센터를 찾았다. 백 씨는 “예전에는 혼자 출동해 시체를 봐도 괜찮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퇴근해 집 문을 열면 안에 목을 맨 시체가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불면증 때문에 술에 의존하던 백 씨는 석 달간 치료를 받다가 지난해 결국 휴직했다.

10년 차 경찰인 E 경위(33·여)도 올해 초 트라우마센터에 상담을 요청했다. 자살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순간 손쓸 틈도 없이 눈앞에서 사람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뒤 충격을 받았다. 실종사건이 결국 자살로 밝혀졌을 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원망할 곳 없는 유가족이 “좀 더 일찍 찾았으면 애가 살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책임감과 죄책감,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몰아친 것이다.

소방관 F 씨(35)는 2014년 투신자살한 50대 남성을 구조하려다가 실패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동료들은 “이미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망해 있었다”며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공포심 때문에 남성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F 씨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짓눌렸다.

자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어도 자살 시도자나 유가족을 자주 접하는 심리상담사들 역시 간접적인 트라우마가 있다. 열차 기관사들도 운행 중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고를 겪은 경우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불시에 현장에 출동해야 하거나 교대근무 일정이 빠듯한 이들이 적시에 충분한 상담치료를 받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경찰청은 2014년부터 전국 네 곳에 트라우마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상담사는 센터별로 1명에 그치고 있다. 국민안전처는 ‘찾아가는 심리상담실’을 지난해 19개 소방서에서 올해 30개서로 확대 운영하고 있지만 역시 장기적인 치료를 하기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조직문화나 이미지도 장애물로 작용한다.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인사나 조직 내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경찰청 조규형 복지지원계장은 “‘경찰은 강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도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자살#제3자#트라우마#청소년#경찰#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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