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도 예상 못한 판결”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직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노상강도를 당한 기분”이라며 판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년 넘는 치열한 진실 공방 끝에 홍준표 경남도지사(62)에게 유죄가 선고되면서 1차전은 검찰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법원은 검찰이 핵심 증거로 제시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육성 녹음파일과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홍 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반면 홍 지사 측은 이번 판결이 확정될 경우 도지사직까지 잃게 돼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8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현용선)의 심리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홍 지사는 재판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미리 도착해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갈수록 주먹을 쥐락펴락 반복하며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재판부가 ‘징역 1년 6개월, 추징금 1억 원’의 실형을 선고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살짝 떨궜다.
○ 성완종 남긴 진술과 메모, 증거 능력 인정
성 전 회장이 죽기 전 남긴 진술 내용과 메모의 증거 능력 인정 여부는 이번 재판의 주요 쟁점이다. 법원은 1월 유죄 판결을 받은 이완구 전 국무총리(65)에 이어 이번에도 성 전 회장이 남긴 생전 진술과 메모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성 전 회장의 생전 진술에 대해 “진술 경위가 자연스럽고 다른 사람들의 진술 내용과 부합해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법정에서 이뤄진 진술만을 재판의 증거로 인정하지만, 당사자가 사망해 진술이 불가능할 경우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에서 진술했거나 작성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증거로 삼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검찰이 제시한 녹음파일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은 지난해 3월 말 검찰의 경남기업 압수수색 후 내부 대책회의에서 “비자금 중 1억 원은 2011년에 윤승모에게 줬다”고 말했다. 같은 해 4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윤 전 부사장를 찾았을 때 윤 전 부사장이 “홍 지사에게 (돈) 준 것 확인했느냐”고 묻자 성 전 회장은 “확인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이 사망 직전 경향신문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홍 지사에게 돈을 준 시점을 “(2011년) 대표 경선할 때”라고 명확히 밝혔다.
재판부는 성 전 회장의 이런 진술이 측근의 진술 및 객관적인 정황 증거와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 ‘돈 전달자’ 윤승모, 일관되게 전달 사실 인정
‘돈 전달자’로 지목된 윤 전 부사장이 일관되게 돈을 전달한 혐의를 인정하고 전달 과정을 진술한 부분도 홍 지사의 유죄 판결을 뒷받침했다. 재판부는 윤 전 부사장 진술에 대해 “일부 객관적 사실이나 다른 사람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금품 전달 과정에 대해 수사기관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어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홍 지사 측은 그간 1심 재판 과정에서 “윤 전 부사장의 진술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고 신빙성 문제를 파고들었다. 윤 전 부사장은 홍 지사에게 돈을 건넬 당시 의원회관 지하 1층 안내실을 거쳐 갔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으나 당시 내부 리모델링 관계로 해당 안내실은 폐쇄된 상태였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4년 넘게 지난 일인 만큼 일부 기억이 불명확한 부분은 있을 수 있지만 일관된 금품 전달 부분은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성 전 회장과 윤 전 부사장이 나눈 대화 내용, 성 전 회장 측근들의 진술 등으로 볼 때 윤 전 부사장이 ‘배달사고’를 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며 1억 원 횡령 가능성을 일축했다.
재판부는 혐의를 인정한 윤 전 부사장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양형에 반영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하지만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한 홍 지사에 대해선 “윤 전 부사장이 허위로 사실을 꾸며 냈다거나 1억 원을 임의 소비했다고 주장하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 꺼지지 않은 ‘성완종 리스트’ 로비 의혹
이 전 총리에 이어 홍 지사에 대한 유죄 선고로 ‘성완종 리스트’의 증명력이 또 한 차례 입증되면서 기소되지 않은 6인을 둘러싼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전 총리와 홍 지사에 대한 불법 정치자금 수사는 성 전 회장의 죽음이 발단이 됐다. 성 전 회장은 지난해 4월 9일 자원외교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력 정치인 8인의 이름이 적힌 메모를 남겼다. 당시 메모에는 ‘김기춘 10만 달러, 허태열 7억 원, 홍문종 2억 원, 서병수 2억 원, 유정복 3억 원, 홍준표 1억 원, 이완구, 이병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하고 수사에 착수해 지난해 7월 이 전 총리와 홍 지사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전 총리와 홍 지사 외에 나머지 6명에 대해서는 수사를 벌였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무혐의 또는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성 전 회장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총리는 1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2일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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