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대비 제대로 하자]국내 건물 비구조물 ‘지진 무방비’
경주 5명 떨어진 물건에 맞아 부상… 학교 218곳 중 102곳 파손 등 피해
병원-소방시설 기능 마비될 수도
칠레 지진때 병원 62% 제기능 못해… 국내 비구조물 내진기준 유명무실
“이것 보세요. 건물 외벽 마감재를 손으로도 뗄 수 있을 정도네요.”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5층 건물을 둘러보던 김영민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정책기획위원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뜯겨진 1층 외벽 마감재 안으로 콘크리트 골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철물로 견고하게 고정돼 있어야 할 석재 마감재 일부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날 전문가와 함께 둘러본 서울 강남대로 주변의 건물 20곳은 대부분 석재나 유리로 외벽을 마감했다. 김 위원장은 “지진이 발생하면 콘크리트나 철근으로 된 건물 뼈대는 무너지지 않아도 이런 외벽 마감재는 충격을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다.
○ 지진 인명피해 주원인은 ‘비(非)구조물’
지진 때 낙하물 사고가 우려되는 건 외벽 마감재뿐이 아니다. 근처 식당 옥상에는 약 15m 높이의 철탑이 설치돼 있었다. 태풍 등 거센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강남대로 일대는 상가건물의 벽면마다 간판 수십 개가 뒤덮고 있었다. 또 대형 수입차량 전시장은 도로 쪽 벽면의 70%가 유리였다. 지진이 났을 때 언제라도 보행자를 덮칠 수 있는 비구조물이다.
비구조물은 건물 골격을 제외한 외벽과 유리, 승강기, 전기·소방시설, 광고판 등을 말한다. 사무실이나 가정의 조명, 가전, 가구도 포함된다. 지진이 발생하면 건물이나 교량이 무너지는 걸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인명 피해는 이런 비구조물 탓이 크다. 특히 도심에서 지진이 날 때는 비구조물 낙하에 따른 피해가 막대하다. 김 위원장은 “지진으로 인한 사상자의 70∼80%는 비구조물이 떨어지거나 파손되면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12일 발생한 경주 지진으로 입원한 환자 23명 중 5명은 텔레비전, 가구 등 낙하물을 피하지 못해 다친 경우였다.
학교시설 피해는 더 심각했다. 교육부가 국민의당 이용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진 피해를 입은 경주지역 218개 초중고교 가운데 102개교에서 비구조물이 떨어지거나 파손되는 피해가 발생했다. 대다수는 천장과 벽의 타일과 조명이 떨어지는 등 낙하물 사고였다. 승강기와 배관시설이 파손된 학교도 있었다. 이 의원은 “학교 내진 설계가 구조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비구조물 안전은 간과하고 있다”며 “내진 보강이 끝난 학교도 아이들의 안전을 안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병원·소방시설 비구조물 피해는 치명적
비구조물로 인한 지진 피해는 낙하물 사고뿐이 아니다. 소방이나 전기, 통신시설이 파손되면 대형 화재 등 2차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곳은 병원이다. 구조물진단학회에 따르면 2010년 칠레 지진 당시 공공병원 130곳의 62%가 전기, 조명시설 등 비구조물이 파손돼 제 기능을 못 했다. 4곳은 아예 운영이 중단됐다.
박홍근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지진으로 병원이 무너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수술 등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건축물 중요도 기준에서 대형 병원은 특수시설로 분류돼 일반 건물의 1.5배 내진 기준을 갖춰야 하지만 과연 그 기준에 맞게 설계됐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정부가 발표한 ‘내진율 42%’(내진 설계 대상 건축물 기준)가 실제 내진 성능과 동떨어진 통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건물 붕괴나 매몰 사고는 피할 수 있어도 비구조물 파손으로 인한 인명 및 재산 피해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뒤늦게 비구조물 피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형식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앞서 국민안전처는 5월 지진방재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유리와 승강기, 조명 등 비구조물의 내진 설계 기준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존의 ‘건축구조기준’과 비교하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유리와 벽의 틈새 기준 등 일부 규정이 신설됐을 뿐 대부분 기존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박 교수는 “비구조물 내진 기준은 이미 마련돼 있다. 설계나 시공 과정에서 이를 따르지 않고 점검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강진을 자주 겪은 일본, 미국 등 방재 선진국들은 비구조물 내진 기준을 엄격하게 따른다. 미국의 건축물 안전기준에는 ‘영구적으로 설치하는 비구조물은 지진 진동에 견딜 수 있게 설계돼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일본은 조명기구 등에 이중 고정장치를 설치하도록 해 낙하물 사고를 예방하고 있다. 정광량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은 “미국 등 건축 안전기준이 까다로운 나라에서는 비구조물 하나를 추가로 설치할 때마다 안전에 영향이 없는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비구조물 내진 설계를 감독할 수 있도록 건축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비(非)구조물 ::
건축물의 기둥과 기초 벽체 등 구조물을 제외하고 여기에 설치되는 부착물을 말한다. 외벽 칸막이벽 천장 조명 물탱크 전기통신장비 승강기 등이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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