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길 씨(59·임대업)는 약 50년 전 서울 성동구에 터를 잡았다. 소위 말하는 ‘부촌’은 아니지만 이웃 간 정이 넘치는 편안한 동네였다. 그러나 약 10년 전부터 동네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2005년 서울숲이 문을 열고 수제화거리 등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광객까지 몰리기 시작했다. 주변 건물의 임대료가 올랐고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온 동네식당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차료 때문에 이곳을 찾았던 청년 사업가나 예술가들도 높은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동네를 떴다.
터줏대감들의 빈자리를 채운 건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와 유흥업소들이었다. 최근에는 유명 연예인들의 건물 매입 소식까지 들려왔다. 신문에서나 보던 ‘젠트리피케이션’(동네가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차료가 올라 기존 상인과 주민들이 떠나는 현상)이 송 씨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22일 성동구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서울숲길의 공시지가는 2005년 대비 109.3% 상승했고 같은 기간 방송대길은 115.9% 올랐다.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으로 꼽히는 이태원 경리단길(109.0%)보다 높은 수치다. 2005년 서울숲길과 방송대길 상원길에 있는 전체 식음업종의 2.5%였던 카페는 2014년 7.3%로 증가했다. 분식점은 2배 이상 늘어났다. 방문객이 늘면서 지하철 서울숲역의 이용객은 3년 전에 비해 30%가량 증가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현실로 닥치자 지난해 9월 성동구는 전국 최초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를 만들었다. 올 1월에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전담 부서도 신설했다. 성동구는 가장 먼저 건물주 설득에 나섰다. 임대료 상승을 최소화해야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전부터 공무원들이 건물주들을 일일이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민감한 임대료 문제에 만남조차 꺼리던 건물주들은 성동구 직원들의 지속적인 설득에 조금씩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성동구의 뜻에 공감한 건물주들은 ‘지역공동체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상생 협약서’에 서명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을 준수해 적정 임대료를 유지하고 임차인이 재계약을 희망하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 적극 협력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서울숲길과 방송대길 상원길 건물 255채 가운데 153채가 상생 협약에 참여했다. 송 씨는 “공방이나 청년 사업가들이 가득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임대료를 올리면 당장이야 좋겠지만 결국 우리 동네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송 씨는 ‘지속적인 소통’을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꼽았다. 송 씨는 “소통 없이 돈만 오가다 보면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면서 “세입자가 잘되고 행복해야 건물주도 행복하다”며 상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동구는 지난해 제정한 조례를 토대로 서울숲길 방송대길 상원길 일대를 첫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되면 신규 업체 입점 시 주민협의체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성동구 관계자는 “23일 지역공동체 상호협력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달 말 고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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