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요즘이지만 한 달 전만 해도 고통지수를 높인 것은 폭염이었다. 9·12 경주 지진을 계기로 국민의 걱정거리는 폭염에서 지진으로 이동했다. 봄철 미세먼지까지 포함하면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이 금년에만 크게 세 번 바뀐 셈이다.
지진, 폭염, 미세먼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 3대 리스크는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발암물질인 미세먼지는 장기간 노출되면 치명적이지만 하루 이틀에 사람이 어찌 되는 건 아니다. 폭염과 지진은 자연재난으로 단기적 충격이 크다는 점은 같지만 예측 불가능성과 피해 범위로 보자면 지진 리스크가 훨씬 크다.
리스크 전문가인 찰스 페로 예일대 교수는 복잡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시스템이 갑작스럽게 연계되면서 재난이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지진은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원자력발전소와 결합될 때 파괴력이 커지는 게 단적인 예다. 따라서 경주 지진을 계기로 활성단층 위에 원전이 세워지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기 때문에 신고리 5, 6호기 승인 취소를 포함해 가동 중인 원전도 단계적으로 중지해야 한다는 환경단체와 정치권 일각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논거 중 하나는 “원전 밀집지역 인근 활성단층에서 최대 규모 8.3의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2012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보고서이지만 연구원 측도 인정했듯 보고서는 완벽하지 않다.
우린 땅 밑 사정에 어둡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단층지도를 완성하는 데 25년이 걸린다. 활성단층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원전을 짓지 말자면 지구상에 건설될 원전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화산과 지진의 나라 일본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까지 54개 원전을 가동했고 엄밀히 말해 후쿠시마 사고의 원인도 9.0 지진이 아니라 원전을 덮친 쓰나미였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책 간 충돌이다. 8월 폭염을 기억하는 국민은 에어컨 없는 여름을 상상할 수 없다. 갱년기 증세가 심각한 나는 에어컨을 켜지 않느니 차라리 열흘간 굶는 편을 택하겠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대비는 이제 생존권, 즉 기후복지로 이해돼야 한다. 우리나라 전력이 석탄발전소와 원전으로 유지되고 있다. 지진이 두렵다고 원전을 줄인다면 폭염과 겨울철 추위는 어떻게 할 건가.
미세먼지 대책도 원전에 빚지고 있다. 미세먼지 발생원은 경유차와 석탄발전소. 원전 비중을 줄이려면 석탄발전소를 늘려야 하는데 그러면 미세먼지는 감내해야 한다. 세 가지 리스크는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로 그 삼각형의 무게중심에 원전이 존재한다.
오해 마시라. 필자는 원전 지지자가 아니다. 다만 지진으로 인한 원전 걱정도 싫고, 비싼 전기요금 내는 것도 싫고, 미세먼지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동시에 충족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3대 리스크는 서로 모순되는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리스크에는 해법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관리될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양한 안전욕구 가운데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속사정을 이해하면 원전 중단 얘기는 그리 쉽게는 못 나올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