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리더십이 남성의 전유물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태어난 10대 여자아이들은 여성 지도자를 당연시할지도 모른다. 언론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성 지도자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영국과 독일에 이어 마침내 미국에서도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여풍(女風)은 해외 한인사회에서도 거세다. 최근 미국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인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의 한인회장에 모두 여성이 당선됐다. 로라 전(한국명 전유미·57) 로스앤젤레스한인회장, 김민선 뉴욕한인회장(56), 임소정 워싱턴한인연합회장(52)이다. 이들은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주철기) 주최로 서울에서 열리는 ‘2016 세계한인회장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5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월드에서 이들을 만났다.
○ 투명해진 한인회, 지금은 ‘세대교체 중’
전 세계 한인회장 384명 중 여성은 66명. 그 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김 회장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목격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투명한 회계와 운영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김 회장은 음악예술학교인 롱아일랜드 컨서버토리(LIC) 학장을 맡아 음악교육에 매진해왔다.
그가 수년 전 한인회 이사장직을 제안받아 의욕적으로 일을 하다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김 회장은 “오랫동안 ‘관행’이라는 말로 용서가 되고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5달러, 10달러씩 성금을 내서 20년 전에 세운 맨해튼 첼시 한인회관이 어느 날 부동산 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것을 보았다. 이사회 의결 없이 일부 임원이 몰래 재산을 팔려고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정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는 ‘이러다 한인회에 대한 불신이 커지겠다’는 생각에 아예 회장직 선거에 나섰고 2015년 당선됐다. 회계의 투명성뿐 아니라 그가 제시한 한인회의 미래 청사진에 교민들이 호응한 것이다.
김 회장은 “‘끼리끼리’ 문화에서 벗어나 이민 2, 3세대 전문직 청년들을 한인회에 영입하면서 활동이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 미 대선에 한인사회도 ‘촉각’
최근 미국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인 미국 대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의 이익을 망치고 있다고 믿고, 외국인 이민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어 미국 내 한인들도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전당대회를 모두 다녀왔다는 임 회장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지방에 사는 백인 노동자층의 트럼프 지지가 굳건하다”고 전했다. 심지어 1950, 60년대 정착한 이민자들조차 새로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있는 만큼 당선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공화당을 지지하는 한인들 중에서도 ‘트럼프는 못 찍겠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뉴욕의 경우 힐러리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 성향이 강한데 뉴욕 한인들이 클린턴에게는 30만 달러를 모금해 주고, 트럼프에게는 4800달러만 줬다고 한다”고 말했다.
한인회의 역할은 다양하다. 과거 이민을 가서 먹고살기에 바빴던 1세대는 자식 교육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민 2, 3세대로 지날수록 미국 주류사회에 뛰어들거나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한인회는 미 주류사회에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다. 한인사회가 공통적으로 지적해 불편한 사항을 개선하기도 한다.
한국 지방토산품이 미국에 수출될 수 있도록 홍보도 한다. 김 회장은 “풍기 인삼, 영주 사과, 보성 녹차와 같은 우수한 제품을 갖고 오면 우리가 미국 사회에 전파하는 통로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뉴욕한인회는 아예 보성 녹차를 한인회 공식 음료로 지정해 외부 손님에게 항상 대접하고 있다. 또 내년 3월 개관할 예정인 맨해튼 첼시의 이민박물관 뮤지엄숍에서 한국 특산물을 전시 및 판매할 계획이다. 이민박물관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뮤지엄숍에서 한국 상품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셈이다.
○ “도시락에 김이랑 김치 싸주세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린 시절 이민해 미국에서 22년 이상 보험업을 해온 임 회장은 “제가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한국인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도시락 반찬으로 한국 음식을 싸 달라고 하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한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의 모습을 미국인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국은 외교나 경제에서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만약 한국을 이해하는 재외동포가 미국 사회에 잘 정착해 성공하고 한국 기업과 외교에도 기여한다면 가장 좋은 방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인회장들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선거에서 재외국민 투표율이 낮은 데 대해서도 “영사관 같은 곳 한두 군데만 투표소로 지정하는데 미국이 워낙 넓다보니 4시간씩 운전해서 가야 하는 사람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아쉬워했다. 보안성을 높인 뒤 인터넷투표나 우편투표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72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도 당부했다. 전 회장은 “한국 기업과 외교당국이 재외동포 네트워킹을 제대로 활용하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체계적인 데이터 관리 등을 통해 충실히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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