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옹진군 연평도 연평초등학교 인근에는 2010년 북한의 포격으로 땅이 푹 꺼진 현장 사진과 이를 설명하는 게시물이 설치돼 있다. 6년이 지나도 연평도는 그때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일 연평초에는 평소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의 책 버스에 모인 1, 2학년생 16명은 스토리텔러 최순자 씨가 강아지 똥 모형을 들자 키득키득 웃음부터 터뜨렸다.
“내가 아주아주 답답한 곳을 빠져나왔는데 여기가 어디지? 너희들은 어느 학교 친구들이니?”(최 씨)
“연평초등학교요!”(학생들)
○ 문화 싣고 달리는 책 버스
올가을 꽃게 철에도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탓에 시름에 빠져 있던 연평도 어민들은 최근 본격적으로 꽃게잡이에 나서고 있었다. 해경 고속단정 침몰 사건 이후 중국 어선이 그나마 줄어든 덕분이다. 해질 무렵 연평도 항구에는 꽃게를 가득 실은 배가 들어와 이를 트럭으로 옮기는 손놀림이 분주해지는 등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여기에 ‘작은도서관…’ 등이 10∼12일 사흘간 책 버스 행사와 공연 등으로 책 문화 향연을 펼치자 학생과 주민, 군인들은 이내 흠뻑 젖어들었다.
11일에는 김인자 작가가 학생들에게 그림책과 에세이집을 읽어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연평초 6학년 박은경 양은 “김 작가님이 ‘할매 할배 참 곱소’라는 책을 쓰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30여 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작은도서관…’ 대표인 김수연 목사(70)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고정욱 동화작가가 쓴 ‘책 할아버지의 행복도서관’을 연평초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아이 이름과 함께 ‘책을 읽으면 행복해집니다’ ‘책을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란 당부를 일일이 쓰고 사인을 했다.
10일 저녁에는 마을회관인 연평종합회관 앞마당에서 가수 서수남 씨가 노래를 부르고 발레 ‘지젤’ 영상물을 상영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주민 100여 명이 함께했다. 흥에 겨워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는 아이도 있었다. ○ 연평부대, 문화가 꽃피다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주최로 테너 신재호, 소프라노 김문희 씨가 해병대 연평부대를 직접 찾아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내 마음의 강물’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등을 불러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창작발레 ‘심청’, 오페라 ‘마술피리’ 영상물도 상영했다. 고학찬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은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있는 서해5도의 연평도에서 발레 ‘심청’을 처음 선보이게 돼 뜻깊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은 세계문학전집 300권과 신간 베스트셀러 100권을 포함해 총 400권을 연평부대에 전달했다. 국민은행은 내년 초 주민과 군인 가족을 위해 컨테이너를 도서관으로 꾸민 ‘컨테이너 도서관’도 기증할 예정이다. 박이성 연평부대장은 “입대 후 책 읽는 습관을 갖게 된 군인이 많은데 신간을 보면 무척 반가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병에게는 도덕경, 논어, 명심보감, 탈무드 등 2000여 권의 포켓북을 전달했다. 김상민 병장(22)은 “제대 후 복학 준비를 위해 책을 가까이 했는데 마음을 더 다잡고 읽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남북 대치에 따른 아픔이 서린 연평도에서 책 버스가 출발하게 돼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 “책 한권 펼쳐들고 벙글벙글 웃어주세요” ▼
작은도서관 전국공연 서수남씨
“벙글벙글 벙글벙글 웃어 주세요. 화내지 말고∼.”
해병대 연평부대에 11일 저녁 기타 소리와 함께 ‘벙글벙글 웃어 주세요’를 부르는 가수 서수남 씨(73·사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물농장’ ‘팔도유람’ 등 신명 나는 노래가 이어지자 사병들은 큰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어깨를 들썩였다. 우렁찬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서 씨는 김수연 목사와의 인연으로 2014년부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고 있다. 올해로 가수 인생 52년을 맞은 그는 행사장 분위기를 띄우는 데 톡톡히 역할을 한다. 중년 이상의 팬들은 그를 보면 반가워하고, 젊은 세대들은 얼굴은 몰라도 ‘닭장 속에는 암탉이∼’라는 ‘동물농장’의 가사가 나오면 ‘아, 그 노래’라며 박수를 친다. 이날도 서 씨가 공연 전 연평도 골목을 다니자 주민들은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넸고, 소주를 마시던 남성들은 “한잔하고 가시라”며 손짓하기도 했다.
서 씨는 “작은도서관을 통해 사람들을 돕자는 취지로 참여했는데 오히려 내 인생이 바뀐 것 같다”며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새 피곤함을 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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