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증권은 최근 제정한 삼강오륜에 ‘더치페이의 생활화’를 아예 한 덕목으로 집어넣었고, 모 건설회사의 사내 설문조사에는 78%의 직원이 더치페이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더치페이 문화의 확산을 가장 반기는 층은 간부급 상사들. 부하 직원들과의 회식 때마다 소위 물주 노릇을 해야 했지만 요즘 같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때에 부담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
어느 신문기사 일부인데, 최근 기사가 아니다. 무려 18년 전인, IMF 금융위기 한파가 몰아치던 시절인 1998년 7월 10일자 동아일보에 나온 ‘얇아진 지갑 직장인들 더치페이 확산’의 일부다. 당시 2030이 지금 4050이다. 요즘 2030 직장인들 사이에서 더치페이가 문화로 자리 잡은 것과 함께, 지금의 4050 직장인들도 더치페이 문화에 관대한 배경이 바로 저것이다. 과거 경제 위기 상황에서 직장인의 더치페이 바람이 불었던 그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요즘 직장인은 호기롭게 “내가 다 낼게”라는 말을 쉽사리 못한다. 과거엔 술자리에서 돈도 잘 내고 잔소리도 잘하면 선배, 잔소리는 안하고 돈만 잘 내면 좋은 선배, 돈도 잘 안 내고 잔소리만 하면 꼰대 선배였다. 결국 좋은 선배는 지갑의 두께가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돈을 내는 건 간혹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의 몫일 뿐이다. 돈과 사람은 별개가 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 가야 한다. 그것이 불황의 시대, 우리가 돈 앞에서 덜 주눅 드는 방법이다.
요즘 은퇴한 5060들 때문에 당구장이 다시 호황을 누린다. 당구장은 5060이 젊은 시절부터 경험했던 가장 익숙한 곳이자 비용도 싼 놀이공간이다. 그런데 요즘 5060은 당구장에서 내기당구보다 더치페이를 선호한다. 과거에는 당구장에서 내기당구치고 진 사람이 당구비는 물론이고 짜장면까지 샀다. 이기면 공짜라서 좋지만 지는 사람에겐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기당구의 스릴도 얇은 주머니 사정 앞에선 사치인 셈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지금 더치페이는 연령과 무관하게 확산 중이다.
직장인의 더치페이 문화가 확산되면서 식당에서 각자 카드로 각자 먹은 걸 계산하는 이가 늘다보니 일부 식당에선 아예 각자 계산이 불가하다는 푯말을 내걸기도 했다. 바쁜 점심시간에 계산하느라 식당 운영에 차질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미 서울의 큰 식당 체인이나 2030이 많이 찾는 식당에서는 셀프 주문 기계를 도입하는 등 더치페이 시대를 대비한다.
더치페이 문화가 보편화된 일본의 경우 식권자판기가 설치된 식당이 많다. 중국에서는 더치페이를 AA즈(AA制·더치페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대표적 메신저인 위챗에는 AA로 돈 받기 메뉴도 있다. 개인 간에 위챗으로 송금도 하고, 돈을 받을 수도 있다 보니 현금이나 신용카드 없이도 더치페이가 쉽다. 알리바바의 알리페이도 마찬가지다. 중국 식당에서도 현금을 받지 않는 곳이 늘어나는 것이다. 핀테크가 더치페이를 수월하게 도와준다. 국내에서도 핀테크 스타트업이 간편 송금을 비롯해 더치페이에 용이한 서비스를 하고, KB국민은행과 농협이 출시한 모바일 은행 서비스가 더치페이 기능을 제공한다. 이는 다른 은행으로도 빠르게 확산된다.
돈은 주도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녀 간의 더치페이도 중요하다. 한국은 남녀평등지수가 세계적으로도 최하위권이다. 데이트폭력은 남녀가 평등한 관계에서보다 그렇지 않은 관계에서 훨씬 많이 나타난다. 돈을 쓰면서도 젠틀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남자도 있겠지만, 찌질한 남자들 중에선 돈을 내고 우위를 점하려는 이도 있다. 그러니 여성은 데이트할 때 당당히 더치페이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연애를 해야 한다. 남자는 데이트 비용 좀 냈다고 유세떨지 말아야 한다. 돈은 있는 사람이 더 내면 된다. 그뿐이다. 더치페이가 트렌드가 되면 한국인이 겪는 수많은 고질적 문제점 중 바뀔 게 꽤 많을 것이다.
올 1월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5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1위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4개국은 Top5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네덜란드도 공동 5위다. 북유럽 4개국과 네덜란드는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들인 셈인데, 흥미롭게도 가장 더치페이를 잘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이건 우연이 결코 아니다. 한국은 OECD 34개국 중 CPI 27위다. 밥 얻어먹는 걸 대수롭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얻어먹은 것 때문에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누굴 봐줘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투명성을 위해서도 더치페이는 중요한 태도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법인 59만1694곳이 법인카드로 결제한 접대비는 9조9685억 원이었다. 기업 접대비는 2008년 7조502억 원에서 2014년 9조3368억 원을 거쳐 2015년 10조 원에 육박하며 지속적 증가세를 보였다. 경제가 어렵다느니 불황이니 해도 접대비는 증가한 것이다. 특히 유흥업소에서 쓴 접대비는 1조1418억 원이었다. 이중 룸살롱이 6772억 원으로 59%를 차지했고, 단란주점이 18%, 요정이 9%였다. 이런데서 술 마시며 접대해야 비즈니스가 가능한 나라인가?
기업 접대비 중 유흥업소 접대비는 2008년 이래 2015년까지 8년 연속 1조 원을 계속 넘었다. 사실 이 금액은 가장 적게 잡은 액수다. 국세청이 제시하는 기업접대비라는 것이 기업이 접대비라는 명목으로 신고하며 법인카드로만 쓴 것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있어도 여전히 편법으로 피해갈 구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거다. 늘 이런 데에서는 아주 비상하게 머리를 굴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기업 접대비가 많아야 한국 경제가 살아날까? 부정부패를 막으면 한국 기업이 죽고 한국 경제도 위축될까?
참고로,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청해진해운이 2013년 신고한 접대비는 6000만 원이었다. 반면 안전교육을 비롯한 선원들 교육비에 쓴 돈은 54만 원에 지나지 않았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것보다 접대를 잘하는 것이 한국에서 비즈니스 잘하는 방법이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김용섭은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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