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직 사회에서 우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정한 일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공모하면서 서로를 “친구야”라고 부르는 뻔뻔함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양심의 갈증을 느끼듯 우정이 진정 무엇인지 곰곰 다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사람들은 우정에 대해 논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법률가와 정치가로서 고위 공직을 두루 거친 로마 공화정 때의 철학자 키케로의 ‘우정론’은 2000여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사회의 공인들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키케로는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선한 사람’이라 함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행동에서 “성실과 정직, 공정성과 아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탐욕과 방종,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굳건하게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미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 것이고 그 우정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 주니, 미덕 없이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정은 친구들에게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을 가져다주지만, 그렇다고 우의가 구체적인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족감을 갖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미덕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끌리는 법입니다. 키케로의 ‘우정론’에 등장하는 라일리우스와 그의 평생지기 스키피오의 우정도 서로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서로의 미덕과 인격을 찬탄한 까닭에 서로 좋아했고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될수록 우의도 깊어갔던 겁니다. 만약 이익이 우정의 접착제라면 이익이 사라지면 우정도 해체될 것 아니겠습니까. 키케로는 또한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덕과 선행을 전제로 할 때 친구에게 어느 정도까지 청할 수 있고, 친구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베풀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케로는 우정의 제일 법칙으로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 되고, 요구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친구에게 옳지 못한 것은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친구에게는 옳은 것만 행해야 하며 이때에는 굳이 친구의 부탁이 없어도 나서서 해야 합니다. 옳지 못한 일은 단호히 거절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항상 돕겠다는 열성을 보이고 꾸물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하는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을지언정, 친구를 위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키케로는 “불한당들 사이의 협력이 우정이란 미명으로 비호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우정이 온갖 방종과 범죄를 향해 문을 열어 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은 위험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친구를 맺을 능력을 준 것은 악덕의 동반자가 아니라 미덕의 조력자가 되라는 뜻이다. 미덕은 혼자서는 최고의 목표에 이를 수 없고, 다른 동반자의 미덕과 결합할 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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