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1685∼1750)라는 작곡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흐 앞에는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는데요. 과연 바흐는 어떤 업적을 남겼기에 ‘아버지’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붙은 걸까요. 바흐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헨델(1685∼1759)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아버지 바흐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바흐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바로크 시대
바흐와 헨델 이전에도 조스캥 데프레(1440∼1521), 조반니 팔레스트리나(1525∼1594) 등 르네상스 시대의 대(大)작곡가가 있었지만 바흐가 활동했던 시기인 바로크(1600년경∼1750년) 시대에는 지금 서양 음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많은 특징적인 양식이 시작돼 발전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들은 바로 이 바로크 음악과 바로크에서 발전한 고전, 낭만주의 음악(1700년경∼1900년경), 약 200년 동안 작곡된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음악사에서 바흐가 사망한 1750년을 바로크 시대의 끝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영향력이 큰 작곡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흐, 헨델과 함께 ‘사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당시 바흐보다 더 유명했던 독일 작곡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1681∼1767)도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바흐보다 유명했고, 바흐가 존경했던 작곡가들을 다 누르고 바흐를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흐를 아버지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먼저 바흐는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로, 자신이 잘 다루고 이해하고 있는 악기들을 위해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오르간 음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나 ‘파사칼리아와 푸가 다단조’,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전곡 연주 자체가 큰 영광으로 여겨지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총 6곡), 건반악기를 위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 2권’(각 24곡), 첼로를 위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총 6곡), 지금의 관현악곡 편성에 큰 영향을 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등등. 성악곡들의 반주를 담당하던 악기라는 시각에서 각 악기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독주곡과 합주곡을 작곡해 악기들에 그야말로 ‘아버지’처럼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바흐의 업적은 앞서 언급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나타납니다. 지금은 ‘평균율’이라고 하면 바흐의 작품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평균율은 음들을 조율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음률을 평균하여 실용적으로 간편하게 한 것’입니다. 평균율 이전에 사용되던 조율 방법은 ‘순정률’이라는 것인데 ‘순수하고 가장 어울리는 음들로 구성된 순정 5도와 순정 장3도의 결합에 의해 만든 것’입니다.
순정률 음악은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올림(#)과 내림(♭)이 많은 조(調)는 사용할 수 없었고, 음역이 맞지 않아 조를 옮기려 해도 쉽게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옥타브가 정확히 12음으로 나뉘는 평균율이 고안된 것인데, 여러 작곡가가 평균율을 적용해 작품을 썼지만 바흐처럼 평균율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흐는 1721년, 1741년 각각 2권의 평균율 곡집을 발표했는데, 이후 음악가들은 이 곡에 엄청난 찬사를 보냅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접한 후 작곡의 기초를 다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쇼팽은 모든 곡을 외워서 칠 정도로 연습해 자신의 24개 ‘전주곡’을 바흐처럼 24개의 모든 조성으로 작곡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바흐의 업적은 그가 일생을 바친 교회를 위해 작곡한 교회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흐는 대규모 연주회장에서 연주도 하지 못했고,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작곡했지만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는 단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인과 20명의 자녀-바흐의 2세들 중 빌헬름 프리데만,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요한 크리스티안은 바흐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되었습니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회의 요구에 따라 성실하게 작곡, 레슨, 지휘를 하며 생활했고 평생 부와 명예, 인기와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바흐는 30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cantor·음악감독, 합창장)로 봉직하면서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큰 행사에 쓰일 음악과 주일마다 열리는 예배에 쓰일 곡을 작곡했습니다.
사실 바흐가 사망한 직후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물 하나 있지 않을 정도로 그리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한 고전파, 낭만파 작곡가 음악,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화려한 오페라 등 당대 음악을 연주하기에도 바빴던 시대에 고리타분한 옛 음악으로 치부되던 바흐의 작품을, 그것도 교회에서 연주되던 수난곡을 교회가 아닌 공연장에서 성공리에 연주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한 사람은 바로 멘델스존입니다.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바흐의 스테인드글라스 옆쪽에 멘델스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공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