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지진 왕국’인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아파트와 호텔 등 20여 곳의 설계를 맡은 한 건축설계사무소가 내진설계를 엉터리로 해 건물 붕괴 위험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조작 방법은 간단했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건물에 가해지는 힘을 절반으로 낮춰 계산했다. 엉터리 계산에 따라 기둥과 보를 얇게 설계했고, 철근도 필요한 양보다 훨씬 적게 넣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한국의 구조기술사에 해당하는 구조설계1급 건축사 자격을 신설하고, 건축 확인 및 검사를 강화하는 등 관련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지진에 있어선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다는 일본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한국은 어떨까.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서울 등의 저층 건물 내진설계 실태를 점검한 결과 절반 이상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내진설계확인서의 인감을 위조해 날인하거나 서로 다른 건물에 똑같은 수치를 집어넣은 사례가 무더기로 나왔다. 이 때문에 2011년 건축사 등 124명이 검찰에 고발돼 71명이 약식기소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최근 지은 건물도 다르지 않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박맹우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건축허가를 받은 서울 3개구(광진 중랑 관악구)의 4∼6층 다세대주택 및 도시형생활주택 1179동의 내진설계확인서를 검토한 결과 61%인 720곳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처럼 공란으로 비워두거나 엉터리 수치를 입력한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잘못된 구조 형식을 적용해 막상 지진이 났을 때 견딜 수 없을 것으로 우려되는 건물이 여전히 많았다. 설계자의 확인 도장이 없는 등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게 전체의 35%(407건)로 가장 많았지만 설계 오류도 313건(27%)이나 됐다.
문제는 이런 서류들이 인허가 과정에서 전혀 걸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1년 9월 당시 국토해양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진설계확인서 체크 매뉴얼을 보냈다. 하지만 공란은 없는지, 서류의 형식은 제대로 갖췄는지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내진설계 서류와 도면을 검토하는 공무원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그럴듯하면 ‘통과’다. 국무총리실 산하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따르면 싱가포르, 뉴질랜드 등 세계은행 기업환경평가 중 건축 인허가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국가들은 한국과 달리 자격을 갖춘 건축가 또는 엔지니어가 건축 인허가 신청 서류를 검토하고 승인해 준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내진설계는 일종의 ‘선택사양(옵션)’으로 취급받았다.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라는 생각에다 제대로 적용했다고 집값이 더 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지난달 경주 강진을 계기로 지진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현실적 공포가 됐다. 지금부터라도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철저하게 검증하고 감독해 내진설계의 사각지대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이제는 옵션이 아니라 생명이 걸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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