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역사왜곡의 뿌리 ‘도쿄전범재판 속기록’ 번역 나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5일 03시 00분


서라미씨 등 4명 프로젝트 추진

14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번역가 서라미 씨(오른쪽)와 강신우 씨가 도쿄전범재판 번역 프로젝트의 홍보물을 들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4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번역가 서라미 씨(오른쪽)와 강신우 씨가 도쿄전범재판 번역 프로젝트의 홍보물을 들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런 역사적인 문서가 70년간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고 묻혀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프리랜서 번역가 서라미 씨(34·여)와 송연지 씨(28·여), 번역업체 직장인 김병찬 씨(51), 통역장교 출신 강신우 씨(29) 등 4인은 최근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 속기록 번역을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한국어로 공식 번역된 적이 없는 이 속기록 일부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번역해 출간한다.

 서 씨가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지난해 봄 남편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던 서 씨는 서점에서 ‘도쿄전범재판과 통역’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1946년부터 2년 반 동안 열린 이 재판에 당시 우리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피해 국가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전쟁을 지시한 히로히토 일왕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천황이 곧 국가’라 생각하는 일본으로서는 “일본은 죄가 없다”는 인식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 씨가 발견한 책 역시 당시 총리로 전쟁을 진두지휘해 A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도조 히데키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재판 자체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서 씨는 속기록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 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은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일본어와 영어판 원본뿐이었다. 서 씨는 “일본의 역사왜곡 뿌리가 된 중요한 기록을 아무도 우리말로 옮기지 않았다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우 올해 5월 재판 기록 중 자국과 관련된 부분을 번역해 출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재판에 대한 관심 자체가 거의 없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었던 서 씨의 고민은 1년 넘게 이어졌다. 그는 “군사 외교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재판이었던 만큼 평범한 번역가인 제가 나설 자격이 있는지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올해 5월 일본은 재판 70주년을 맞아 도쿄전범재판을 재검증하기 위해 총리 직속기구까지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서 씨는 결국 8월 말 전 직장 동료 송 씨와 선배 김 씨, 그리고 시동생 강 씨에게 차례로 연락했다. 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48만 쪽에 이르는 속기록 전체를 번역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조 히데키의 증언을 발췌해 ‘A급 전범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기로 한 것이다.

 네 명의 번역가는 각자의 전공 분야를 살려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근현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송 씨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경영서적 등 단행본 번역 경험이 풍부한 서 씨는 복잡한 법적 용어와 어려운 옛날식 표현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한 강 씨는 “도조가 변호인들의 도움으로 작성해 낭독한 ‘증언록’은 법리적으로만 보면 꽤나 객관적인 텍스트”라며 “해석에 따라 일본의 책임이 상당히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고 말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은 김 씨는 “도조는 별명이 ‘면도날’일 정도로 철두철미한 군인으로만 알려져 있다”며 “실제 증언대에서 벌어진 책임공방에서는 비장함을 잃은 모습이 드러나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들이 크라우드펀딩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도쿄전범재판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펀딩 시작 20여 일 만에 169명으로부터 400만 원이 넘는 후원을 받았다. 강 씨는 “저희가 번역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며 “남은 부분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간을 들여서라도 완성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홍정수기자 hong@donga.com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역사왜곡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