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19>대형차량 폭주를 막자
끊이지 않는 음주가무 전세버스
《 대형 버스 안전은 운전사만의 책임이 아니다. 운전사가 교통법규를 잘 지켜도 안전을 위협하는 승객들의 불법 행위가 사라지지 않으면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운수업체나 승객 앞에서 버스 운전사는 ‘을(乙)’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라거나 술판을 벌이며 노래 반주기를 틀어 달라는 승객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 혹시나 불만 신고가 접수되면 다음 배차 때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달 30일 오후 7시경 경북 구미시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 구미 나들목 주변. 짙은 틴팅(선팅)으로 내부를 가린 전세버스 한 대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암행 순찰차가 속도를 내며 버스를 뒤따랐다. 간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암행 순찰차의 속도계 눈금이 시속 120km를 넘어서자 버스 옆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틴팅 너머로 파란색 형광 조명이 번쩍이는 것이 흐릿하게 비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빼곡히 채운 승객들의 실루엣도 보였다.
뒤늦게 순찰차를 발견한 버스는 그제야 실내등을 켜고 갓길에 멈췄다. 단속 경찰관과 함께 버스에 오르자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급히 내부를 정리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는 먹다 남은 막걸리 병과 맥주 캔 수십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춤을 추다 술을 쏟았는지 복도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한 남성은 중앙 부처 이름이 적힌 공무원증을 내밀며 “술은 식당에서만 마셨다. 몇 사람이 잠깐 일어나서 돌아다녔을 뿐이니 한 번만 눈감아 달라”라며 읍소했다. 하지만 이미 운전사는 음주가무 사실을 인정했다. 운전사에게는 벌점 40점과 범칙금 10만 원이 부과됐고 면허정지 40일의 행정처분이 내려졌다.
경북 지역을 관할하는 고속도로순찰대 3지구대가 10월 한 달간 적발한 음주가무 전세버스는 무려 209대. 올해 적발된 차량 529대의 39.5%에 이른다. 단풍놀이나 결혼식 등 전세버스 운행이 급증하는 계절에 맞춰 집중 단속을 벌인 결과다.
10, 11월은 전세버스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 최근 5년간 전세버스 사고 사망자 199명 중 25.1%가 10월(31명)과 11월(19명)에 발생했다. 이응필 경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 5∼8시에 음주가무로 적발되는 차량이 가장 많다”라고 말했다.
단속을 강화하자 버스 운전사들의 꼼수도 늘었다. 이날 기자가 동승한 암행 순찰차에 적발된 버스 2대는 모두 짙은 틴팅과 커튼으로 내부를 꼼꼼하게 가렸다. 고영균 경위는 “최근엔 단속을 피하려고 음량을 최대한 줄이고 달리는 버스가 많다”라고 말했다. 주행 중에는 엔진이나 바람소리 때문에 노래 반주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찰은 주로 차량을 세워 놓고 암행 단속을 한다. 경찰 무전 감지 장치를 설치한 버스도 있어 무전기보다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버스 내 음주가무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운전사와 경찰은 “운전사에게만 벌금과 벌점이 부과될 뿐 승객들은 단속돼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적발된 운전사 박모 씨(43)는 “초등학교 동창회나 마을 계모임 승객들은 계약할 때 노래 반주기가 있는지부터 물어본다”라며 “적발되면 40일 동안 운행을 못 할 수도 있지만 먹고살려면 승객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전세버스의 노래 반주기 설치 여부 등 안전 점검을 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서울시가 지난해 전세버스 1083대를 조사한 결과 노래 반주기를 설치한 버스는 30대(2.8%)에 불과했다. 올해 전세버스 사고가 잇따르면서 지난달 집중 단속에 나섰지만 검사 차량 1116대 중 노래 반주기를 설치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단속을 눈치 챈 운전사들이 검사받을 때만 노래 반주기를 떼는 수법으로 적발을 피하는 것이다.
하승우 교통안전공단 교수는 “노래 반주기가 갈수록 소형화돼 형식적인 단속으로는 적발이 쉽지 않다”라며 “관광지 부근 차고지에서 반주기를 불법 설치해 주는 업자들을 함께 단속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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