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졌다. 옷장에서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는다. 우리 사무소가 보호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난방이 시작되고, 지구 반대편 남극에는 분주한 여름이 시작되는 때다. 중요한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벌써 내일이란다. 4일, 파리 기후변화협정(Paris Agreement)이 발효된다. ‘준비운동 끝, 이제 본 게임이야. 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을 다 함께 축하하자.’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뉴스룸을 보니 ‘준비 완료(All systems go)’ 문구가 눈에 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앞두고 보았던 그 문구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비준해 그 기준이 최근에 충족되었단다.
지난 ‘리우선언’ 및 ‘교토의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기후변화협약인 파리협정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국제적 약속이다.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2020년 이후 이 신(新)기후체제하에서 지구 대기온도 상승분을 2도 이내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래, 뭐든 아껴 쓰라는 거지? 오케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각자 깜냥대로 나눠서 지고 가자는 것이다. 지구의 미래라니. 일상에서 꺼내 놓기에는 조금 벅찬 느낌도 들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주 멀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기상이변이 발생하면 생활터전을 잃고, 아프고, 다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긴다. 온난화로 인한 전염병 재창궐도 드러나는 문제지만 특히 장애인, 홀몸노인, 영유아와 어린이, 열악한 환경의 야외 근로자, 노숙인, 지하층 거주자 같은 이른바 기후변화 취약계층은 원인도 모른 채 가장 먼저 ‘조용한’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단순히 장애나 가난을 이유로 폭염, 가뭄, 한파, 폭설, 태풍, 집중호우에 의해 생명이나 건강에 더 큰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온실가스 감축 노력과 함께 기후변화 적응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또 하나 큰 이슈는 탄소배출권 거래제도이다. 국가와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정해 부족분과 초과분을 서로 사고팔 수 있게 한 것인데, 일종의 주식거래와 비슷하다. 금융이 환경과도 융합되었다는 점에서는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 앞으로 탄소배출권이 일종의 유엔 발행 국제 화폐처럼 작동하면 원유, 금, 각종 원자재 가격 등락처럼 시장지표 중 하나로 환경재가 언급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새로운 지질 연대인 ‘인류세(人類世)’를 만들어낸 인간이 자성의 목소리로 시작한 기후변화협약이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중에도 환경과 미래라는 대의명분 아래 지구촌 공통의 목표를 세웠다. 어김없이 미국, 중국 등 큰손들의 머릿속 셈법이 궁금해진다. 협력 속 보이지 않는 기후패권 경쟁 또한 치열하리라. 때로는 약속 준수라는 압박을 통해, 환경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할 것이다. 아직 신재생에너지가 기존 연료를 대체할 만한 수준은 아니고, 에너지 기술혁신은 더디며,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산업구조를 생각할 때 기후열강 사이에서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겠다.
너무 큰 해일과 파도는 소리 없이 산처럼 서 있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모든 나라에서 ‘준비 완료’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국민은 당연히 도울 것이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전등을 끄고, 가전제품 사용시간을 줄이고, 보일러 난방도 참아가며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선량한 노력들이 망연자실하는 일이 없도록, 허탈감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와 국회의 일이다. 특히 ‘그들만의 리그’에서 몇몇 선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화폐전쟁’이 되지 않았으면. 큰 그림과 기술혁신을 무기로 2030년까지 우리나라가 영리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길 바란다.
7일부터는 모로코에서 22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개최된다. 바쁘다.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도, 파리협약도 일관되게 말한다. 어느 하나 빠지는 이 없이 다 함께 노력하라고.
언뜻 피곤하게도 느껴지지만 먼저가 아니면 억지로 등 떠밀려 해야 할 거다. ‘지구 사랑’을 강요당하는 건 슬프다. 내가 사는 곳인데. 미래 내 아이들이 살 곳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그 2020년은 저만치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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