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초 서울 동작소방서 119구조대 소속 소방관 4명은 화재 현장인 4층짜리 연립주택으로 출동했다. 지하실에 어린 자녀가 있다는 부모의 외침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래된 주택은 맹렬히 타오르는 화마(火魔)에 휩싸여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가장 나이 많은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공기호흡기, 헬멧, 랜턴 등 20kg에 육박하는 장비를 짊어진 채 건물 지하실로 맨 먼저 향했다. 자욱한 연기로 불과 20cm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로 방향을 가늠하며 화염 속으로 들어갔다.
‘삐이…’ 지하실로 진입한 지 20분 만에 공기호흡기에서 비상 알람이 울렸다. 산소가 5%밖에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50분을 버틸 수 있는 산소가 이미 동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불길은 8세 소녀가 있는 작은 방을 피해 갔다. 불길이 시작된 곳을 발견했지만 흐릿한 시야와 알람에 당황한 그는 불을 향해 호스를 조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뒤이어 합세한 동료와 함께 불길을 진압해 나갔다. 소녀는 동료 소방관과 지하실을 무사히 빠져나갔다. 서서히 불길이 잡힐 무렵, 천장 자재가 그의 얼굴로 떨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결국 이 출동을 마지막으로 더는 현장에 나갈 수 없었다.
강기홍 소방관(43)은 3년 전 일을 기억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당시 그가 앞을 제대로 못 본 이유는 자욱한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2만 번 넘게 출동하며 화염과 유독가스에 노출되는 바람에 그의 눈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2003년 소방관 시험에 수석 합격했을 때보다 시력은 10분의 1로 떨어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부상에서 회복한 뒤에도 현장 출동은 엄두도 못 냈고 통신 업무를 맡는 데 그쳤다. 그렇지만 강 소방관은 현장에 나가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강 소방관에게 희소식이 찾아왔다. 잃어 가는 시력을 돌볼 겨를이 없던 소방관이 화재 진압 현장에서 부상하기까지 했다는 사연을 접한 온누리스마일안과의원이 무료 수술을 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의료진은 올 5월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는 수술을 진행했다. 강 소방관은 재활 끝에 예전의 시력과 체력을 되찾았다.
요즘 강 소방관은 10년 넘게 닳도록 입은 방화복과 방수화를 꺼내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2개월 뒤면 그는 현장에 복귀할 수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길 위기를 다시 맞서야 하지만 그의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그는 “왜 다시 위험한 현장을 찾으려 하느냐”라는 질문에 “이 일을 할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라며 담담하게 답했다. “누군가가 생애 마지막이라고 느끼는 위급한 순간에 그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이 직업이 얼마나 멋있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신에게 화염과 맞서 싸울 힘을 달라는 ‘소방관의 기도’가 적혀 있다. 9일은 강 소방관처럼 온몸을 희생하며 불과 싸우는 소방관들을 기념하는 소방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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