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의 임자가 여자임을 곧 알았으리라. 쌍창 가까이 자그마한 책상이 놓이고 그 위에 여자고보 교과서가 책꽂이에 나란히 꽂힌 것이며, 꽃을 물린 문진이며, 저편 벽 밑에 조안화(나팔꽃)를 수놓다가 그대로 둔 자수틀이 비스듬히 기댄 것이며. … 오랜 감방살이에 그리던 이성의 향기가 물씬하고 그의 코를 음습하였다.”
현진건이 1933년 말부터 13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赤道)’의 한 장면이다. 옥살이하고 나온 주인공 여해가 자신의 옛 연인이지만 가정을 이룬 영애의 집을 찾아간 뒤, 영애의 시누이 은주의 방으로 안내된 직후다. 1930년대 초는 ‘책꽂이’라는 말이 우리 땅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할 무렵이다. 오래전부터 ‘책장’이라는 말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서가’도 비교적 널리 쓰였다.
“남들이 기생집에 가는 동안에, 술을 먹고 바둑을 두는 동안에, 그는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붕배(朋輩) 간에도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는 또 한 이유도 그의 책장에 자기네가 알지 못하는 영문, 독문의 금자 박힌 것이 있음이었다.”
내년이면 100주년이 되는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 나오는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의 책장, 곧 우리 근대 초기의 책장이다. 서양의 지식을 한시 바삐 수용하여 근대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작가의 뜻이 소설 속 책장에 깃들었다. 여해가 은주의 책꽂이를 보며, 학생들이 형식의 책장을 살피며 그러했듯이 책장을 통해 그 주인을 짐작할 수 있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1960년대는 책장 풍경으로 자기를 돋보이려는 ‘과시적 교양주의’ 시대였다. 당시 각종 전집들이 인기를 모은 배경으로, 도시 중산층 가정 거실이나 고위직 사무실의 장식용 수요를 들기도 한다. “단행본 출판은 부진한 채 장식 위주의 전집류만 쏟아져 나와 월부 판매에 의존하는 실정이며, 출판물은 가구의 일부로 타락했다”는 진단이 제법 설득력 있다(동아일보 1969년 12월 11일자).
고화질 대형 TV가 거실의 왕좌를 차지한 오늘날과 ‘장식용 전집과 책장’의 시대 사이 격세지감은 크기만 하다. 문자와 영상,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대적 대비는 거실 풍경에서도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TV가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차라리 ‘과시적 교양주의’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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