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반찬가게집 막내, 세계 최고 셰프를 꿈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0일 18시 40분


#.1
반찬가게집 막내,
세계 최고 셰프를 꿈꾸다
#.2
제 이름은 민요한. 대한민국의 스무 살 청년입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서울 광양고 교복을 입고 다녔던 제가
지금은 세계 3대 요리학교이자 '요리계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 합격해 미국 땅을 밟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3
유년 시절 우리 가족은 거실이라고 해봐야
두 평 정도의 '방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종일 반찬가게에서 손수 만든 반찬을 팔면서 일을 하셨어요.
낮에 집에 있는 식구라곤 누나와 저 둘뿐이어서 제가 밥도 직접 해 먹었습니다.
#.4
전교생 300명 중 280등 언저리의 '꼴통' 고3이었던 저는
다행이도 요리를 매우 좋아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꿈은 늘 요리사였죠.
흔한 국영수 학원 한 번 안 다닌 저는
학교에서 돌아온 뒤 긴 하루를 그렇게 요리 세계에 빠져 지냈어요.
#.5
부모님은 그런 저를 인정해주시고, 좋아하는 요리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중학교 때는 좁디좁은 집의 방 하나를 '요리방'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조리대를 만들어 주시고 조리도구를 챙겨 주시기도 했었죠.
#.6
제가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한 건 중1 때였어요.
음식을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이론 공부는 정말 큰 난관이었죠.
무려 7번이나 이론 시험에 떨어졌고, 8번째 도전에서야 실기 응시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중2 때 제 요리방 벽에 걸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총 5개의 자격증을 모두 획득했어요.
#.7
고3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엔 말 못할 꿈이 커져갔어요.
바로 세계 최고의 요리 명문 학교인 미국 CIA를 경험하고 싶다는
'유학의 꿈'이 바로 그것이었죠.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고, 제 영어 성적은 항상 20점대일 때가 많았죠.
#.8
유학 결심을 굳힌 고2 때 처음으로 영어책이 책상에 놓였습니다.
항상 제 손에는 늘 작은 영어 단어장이 쥐여 있었고,
고3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영어 성적표에는 80점대가 찍혀있었어요.
내가 다닌 광양고의 영어선생님은
"수시로 찾아와 물어봐주니 선생님이 더 좋다. 언제든 물어보고 꼭 원하는 셰프가 되도록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9
2015년 여름 그간의 요리 경력과 자기소개서를 써서 CIA로 보냈습니다.
정리하다 보니 뜻밖에 경력인 줄도 몰랐던 봉사활동이 취업과 동일한 경력으로 인정됐어요.
중3 때부터 3년간 매주 구청 카페에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제빵과 바리스타 기술을 가르쳐준 게 400시간이나 된 덕분이죠.
#.10
가을이 지나고 CIA로부터 한 통의 우편물이 왔습니다. 바로 합격통지서였죠.
단, 영어실력이 부족하니 연말까지 회화과정을 이수해 학교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이었어요.
어쨌든 그토록 갈망해온 CIA의 문이 진짜로 눈앞에 열렸던 것이죠.
#.11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나와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가슴 졸이는 관문을
마주했어요. 바로 CIA 유학을 위한 미국 비자(F1) 취득이 그것이었죠.
F1 비자를 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경제력'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 온 부모님의 통장은 항상 넉넉한 적이 없었어요.
#.12
비자 서류를 준비하며 아버지는 "지금처럼 내 인생이 후회된 적이 없다"며 가슴을 치셨어요.
"요한아. 나 때문에 네가 미국에 못 가면 어떻게 하니.
나의 가난으로 너의 꿈이 꺾이고 나의 가난이 너에게 대물림될까 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13
미국대사관 비자 인터뷰 당일, 순서를 기다리는 내 두 손에는 땀이 고였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어눌한 영어지만 면접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집은 가난해요.하지만 제겐 꿈과 비전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가서 온 힘을 다해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14
면접관은 이렇게 말했어요.
"축하합니다. 세계적인 셰프가 돼서 미국에서 만납시다."
대사관에서 나와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죠.
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엉엉 울고 계셨습니다.
#.15
4월 25일. 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을 돌아볼 때입니다.
CIA에 가면 요리사의 꿈을 가진 세계 여러 곳의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새로운 요리에 계속 도전하고 싶습니다.
#.16
아버지의 반찬가게와 나의 주방에는
오늘도 16시간의 시차를 두고 불이 켜집니다.
나는 꿈을 위해,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함께 불을 켭니다.

원본: 임우선 기자
기획제작: 김재형 기자, 김수경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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