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이른바 힙스터나 트렌드세터들이 최근 촛불집회 인증샷을 많이 올렸다. 집회에 나간 게 멋지고 재미있는 일이 돼서다. 그동안 힙스터나 트렌드세터들은 정치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소비와 문화에서는 아주 적극적이었지만, 정치 얘긴 재미없고 지루한 영역이라고 여겼다. 자칫 정치적 견해 때문에 발생할 불이익을 감수하기도 싫었고, 정치적 이슈의 무거움이나 논쟁거리도 싫었다. 그런 걸 따지지 않아도 세상은 흥미롭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정치 이야기다. 덕분에 힙스터와 트렌드세터들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광화문 촛불집회에 갔다 오는 게 힙한 일이 됐다. 요즘 콩글리시로 많이 쓰는 ‘힙(Hip)하다’는 특별하고 개성 있고 멋진 취향을 뜻한다. 힙한 것을 많이 누리는 날은 힙 터지는 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의식 있는 사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힙한 시대다.
사실, 제멋에 사는 힙스터(Hipster)와 탈사회적인 히피(Hippie) 등에서 알 수 있듯 힙은 비주류에 대한 탐닉에서 비롯된 말이다. 원래 아편을 뜻하는 hop이 hip이 되었고, 1940년대 재즈광을 비주류 문화에 빠졌다는 의미로 힙스터라고 불렀다. 21세기 들어 독특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고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중산층 젊은이들을 지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힙스터는 좀 더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이들은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이나 예술, 지식 등을 가치 있게 여긴다. 독립적이고, 자연친화적이거나 채식주의자인 사람도 많고, 동성애에도 관대하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상의 모든 비주류를 탐닉한다.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틀을 거부한다. 진짜 힙스터는 원래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유행을 타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진정성 있는 가치와 자신이 힘겹게 쌓은 취향과 안목에 주목한다. 책에서만 배우지 않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데 적극적이다. 2030뿐 아니라 4050, 아니,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런 태도를 가졌다면 힙스터인 셈이다.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누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즐거운 권리다. 그런 점에서 평화롭게, 마치 축제처럼 벌어지는 최근의 촛불집회는 유쾌하고 즐겁다. SNS에서 자기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본 세대에게는 이런 집회문화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메시지를 쓴 피켓도 속속 등장한다. 마치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마냥 짧지만 재치 있는 메시지가 집회 현장에 유쾌함을 더해준다. 이걸 다시 찍어서 SNS로 퍼뜨리기도 한다. 온오프라인의 결합이다. 독재정권에서 민주화 운동을 해왔던 이들이 겪은 집회문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셀카봉으로 집회에 나온 자신을 찍는 이도 많고, 집회 현장에서 페이스북 동영상 생중계를 하는 이도 많다. 이렇게 해서 현장에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메시지와 분위기를 전한다. 전 국민의 눈이 이곳에 쏠리는 것이다.
덕분에 100만 명이 광화문 일대에 모일 수 있었다. 요즘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에는 월드컵 길거리 응원 때의 흥겨움도 있고, 교황 방한 때의 질서정연함과 평온함도 있다. 행진이나 집회가 끝날 때 보면, 쓰레기봉투를 든 이들이 쓰레기를 치우며 마무리를 한다. 100만 명이나 모인 뜨거운 현장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한 거리로 순식간에 탈바꿈한다. 이런 모습과 상황도 SNS로 전해져 전 국민이 다 지켜본다. 집회 문화가 유행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유행은 급속도로 퍼지며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우린 최악의 국정 농단 상황에서, 최고의 집회문화와 시민의식을 찾은 것이다.
다이소에 가면 건전지로 작동하는 LED 촛불과 핫팩, 그리고 바닥에 깔고 앉을 때 쓰는 접는 방석 등 촛불 집회용 물품이 따로 진열돼있다. 촛불집회를 마케팅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에는 장사꾼도 많다. 양초부터 종이컵,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한 걸 파는데 푸드트럭에서 ‘순살 치킨’이 아닌 ‘순실 치킨’을 팔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 재치 있는 표현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장사를 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보다는 촛불집회라는 새로운 축제이자 문화에 동참하겠다는 의미를 갖고 거리로 나선 장사꾼들도 있다.
사실 이번만 그런 게 아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때도 대형마트나 온라인쇼핑몰에서 견과류를 팔 때 비행기를 그려 넣은 마케팅 메시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회적 이슈가 곧 마케팅 기회다. 아무리 무겁고 화나는 사회적 이슈라도 그걸 마케팅으로 풀어가는 솜씨는 유쾌하고 재치 있다. 소비자도 박수를 치며 반긴다. 소비자의 진화, 아니 국민의 진화다. 당연히 기업이든 정부든 지자체든 이런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는 소비하는 사람이고, 유권자는 투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처음부터 소비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고, 유권자도 표를 던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이들의 진짜 이름은 국민이다. 세상의 주도권을 가진 진짜 주인공이다. 이들이 세상의 변화를 정말로 원한다면 그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트렌드가 몇 년씩 이어지는 흐름이라면, 패러다임은 십년을 넘어 세대를 관통할 수 있는 흐름이 된다.
트렌드는 늘 변한다. 사람의 욕망이 계속 변화하듯, 트렌드도 새롭게 나오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집회마저도 트렌디해진 시대. 집회 나가는 게 멋지고 재미있는 일이 된 시대. 촛불을 들게 한 이유야 화나고 속상하지만, 우리가 촛불을 드는 모습과 인식의 진화는 꽤 인상적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이럴 때 쓸 수 있다.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직접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는 중이다. 촛불, 그건 그냥 불이 켜진 양초가 아니다. 트렌드를 넘어서는 패러다임, 즉 시대적 열풍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김용섭은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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