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천불이 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9일 03시 00분


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190만 개의 촛불이 26일 전국 곳곳에서 다시 한 번 활활 타올랐다. 억장이 무너지고 천불이 난 민초들의 함성이다.

 억장은 ‘억장지성(億丈之城)’이 줄어든 말이다. 1장(丈)은 10척(尺)으로 약 3m이니, 억장은 3억 m다. 그러니 ‘억장이 무너지는’ 건, 높은 성이 무너질 때처럼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천불은 하늘이 내린 불이라는 뜻으로, 저절로 일어난 불이다. 몹시 눈에 거슬리거나 화가 날 때 사람들은 ‘천불이 난다’라고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곁불’이다. 장터 등에서 옹기종기 모여 쬐는, 정감 있는 불이다. 한데 곁불과 ‘겻불’을 헷갈려하는 이가 많다.

 ‘겻불’은 말 그대로 ‘겨를 태우는 불’이다. 이 불은 세지가 않아 ‘불기운이 미미하다’란 뜻이 생겼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라는 속담 속 바로 그 불이다. 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해도 체면 깎일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슷한 속담으로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가 있다.

 곁불은 ‘얻어 쬐는 불’이다. 그래서 가까이해서 보는 덕을 이르기도 한다. ‘콩고물’과 일부 뜻이 같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1970, 80년대 즐겨 불렀던 ‘모닥불’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랫말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모닥불은 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 피우는 불인데, 그런 불로는 오래 얘기할 수 없단다.

 사실 모꼬지 등에서 피우는 불은 화톳불이다. ‘한데다가 장작 등을 모아놓고 태우는 불’ 말이다. 말법대로라면, ‘화톳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라고 노래 불러야 한다는 얘긴데, 노래 맛이 싹 달아난다. 사전도 캠프파이어를 ‘야영지에서 피우는 모닥불’로 올려놓고 있다.

 ‘후림불’은 남의 일에 까닭 없이 휩쓸려 걸려드는 일을 뜻한다. 한자말로 비화(飛火)다. ‘잉걸불’은 다 타지 않은 장작불, ‘꽃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이다. ‘불어리’는 불티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으려고 화로에 들씌우는 가림막이다. 다소 엉뚱한 불도 있는데, ‘소줏불’이 그렇다. 이는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코나 입에서 나오는 독한 알코올 기운을 말한다. 천불을 끄는 방법? 백성의 주장을 하늘처럼 떠받들면 하늘에서 불이 내릴 일이 없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천불#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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