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공기가 꽤 상쾌한 날에는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한다. 광화문, 서울역, 숭례문, 명동, 남산터널, 경리단길, 반포대교를 지나며 서울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마음을 달래는 오랜 습관이다. 이번 주 버스 안에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연말이 태연히 등장한 것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이 세계는 축제와 불빛으로 가득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반짝이는 연말이 낯설게 반가웠다. 버스 창문을 조금 열고 쌀쌀한 겨울 냄새를 맡으며 지나간 열한 달을 곱씹어 보았다.
돌이켜 보면 유난히 긴 한 해였다. 사회적으로 그다지 좋은 소식이 별로 없었다. 연초에는 테러방지법 제정을 두고 필리버스터로 온 나라가 들썩였고, 곧이어 봄날이 되자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어졌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고자 하는 브렉시트로 국제 정세도 어수선해졌으며, 그러던 와중에 대단한 폭염이 찾아와 전기료 누진세로 벌벌 떨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늦가을 녘에 밝혀진 국정 농단 사태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 집회 행진까지, 버스 안에서 생각난 뉴스들은 모두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회사에서도 올해는 크고 힘든 프로젝트에 몸담아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던 터라 시간이 느리게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서 이 고된 일들이 다 마무리되기를, 모든 업무를 끝마치는 12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연말은 참 더디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올해가 얼른 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프로젝트만 끝나면 삼각산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내 뱃가죽을 찢어 북을 만들어 둥둥 치겠다는 생각까지도 그 노랫말에 담았다.
드디어 지난주 공식적인 업무가 끝났다. 남들보다는 조금 이르게 한 해의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날, 우연하게도 대다수 국민의 바람대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이제는 종료된 프로젝트의 서류 더미들을 버리며 탄핵 뉴스를 들었을 때, 개운한 기분이 잠시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 희한하게도 막상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신나서 훨훨 날아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허탈함과 상실감이 밀려왔다. 좋은 일보다는 힘든 일이 많았던 2016년이지만 한 해를 보내는 동안 미운 정이 들어버린 것일까. 시간이 빨리 흐르길 고대하는 만큼 매 순간 더 열심히 살아냈기 때문일까. 정든 것들과의 이별이 언제나 그렇듯 막상 2016년과의 작별인사를 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렇게 원망스럽던 일들도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운 마음은 내년을 잘 살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해본다. 이제 막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으로 새로운 시작이 되었듯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옛 프로젝트의 자리에는 새로운 팀과 일이 들어와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올해만큼만 괜찮은 한 해가 된다면, 이 정도로만 열심히 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이 말이다.
사실 이 글은 휴가지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웅웅거리는 비행 소음을 배경으로 1년 치 노동의 넓이와 깊이와 무게를 재어 본다. 한 해 치 뉴스를 돌이켜 보며 나는, 또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 농사짓는 농부처럼 1년이라는 시간에 맞춰 매년 씨를 뿌리고 거두며 살고 있으니, 연말의 마지막 날들은 내년의 새로운 씨앗을 준비하는 날들로 보내야겠다. 더불어 새로운 열두 달을 선물받는 1월까지, 올해를 잘 놓아줄 수 있는 휴가가 되기를 바라본다. 거리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보다 이렇게 또 한 번 함께 1년을 살아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 오르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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