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아흔을 바라보는 노부부 한 쌍이 주춤주춤 집 밖으로 나왔다. 지역의 한 센터에서 ‘성탄 트리’를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치매 남편을 위해 아내가 수소문해 어렵게 신청한 프로그램이었다. 센터에 도착한 부부는 함께 성탄 트리를 꾸몄다. 남편 허권석 씨(88)는 책상 위에 놓인 방울과 리본을 집어 나뭇가지 위에 매달았다. 꾸민 모습이 어딘가 엉성해 보이자 아내 최용운 씨(83)가 방울의 위치를 고쳐 놓는다. 아내 손길이 닿자 비로소 성탄 트리 느낌이 났다. 아내가 꾸며 놓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남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생애 처음 만든 트리를 한참을 바라봤다. 트리가 완성될 때쯤 남편은 마지막으로 트리 위에 작은 종이를 매달았다. 종이를 본 아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현관문 비밀번호도, 자기 사는 곳도 잊은 남편이 종이 위에 적은 말은 “사랑한다”였다. 많은 것을 잊어가면서도 60년을 함께한 아내를 향한 사랑만은 잊지 않았다.
치매 부부를 위한 ‘트리 만들기’ 수업이 열린 서울 양천구치매지원센터에는 이날 10쌍의 노부부가 모였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0세였고 부부끼리만 의지해 사는 경우가 많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구자선 씨(77)와 그의 아내 김정희 씨(75)도 이날 트리 만들기 수업에 동참했다. 이 부부도 이날 생애 첫 트리를 만들었다. 서툰 솜씨의 남편이 손수 꾸밀 수 있도록 아내는 바로 옆에 가만히 서서 바구니에서 용품을 꺼내 건넸다. 이 부부에게도 새로운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겼다.
치매 남편들에게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아내들이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주민센터와 병원을 찾고 있다. 부부만의 추억 어린 캐럴이 흘러나오자 한 남편은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아내는 마치 병이 나아진 것 같은 남편 모습에 기쁘다. 실제로 허권석 씨는 혼자서 돈 계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전문가들은 부부가 함께하며 과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이 치매에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사회복지단체와 구청 등 지자체가 제공하는 치매 환자 지원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춥기만 하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관계자들은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많지만 재정이 여유롭지 않아 프로그램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해 ‘최순실 게이트’로 기업들의 기부가 크게 줄었다. 한 구청 관계자는 “연말에 의료비, 생활비를 지원하고 쓸쓸한 연말을 보내지 않도록 관련 행사를 매년 열고 있지만 올해 모금이 많이 줄어 예년만큼 행사를 열 수 없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서정석 건국대 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돈이 없어도 몸이 아파도 따뜻한 추억을 하나 만들고 싶은 게 연말인데 기부금이 줄어 안타까운 어르신이 많다니 아쉽다. 본격적인 노령화 사회에 대비해 이젠 국가가 치매 노인에 대한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70여만 명인 국내 치매 환자가 2030년에 13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전체 국민 2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를 부양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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