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초 출산을 앞둔 김모 씨(33)가 최근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코앞에서 들은 얘기다. 조금 편하게 출퇴근하려는 욕심은 접어두더라도 지하철을 가득 메운 승객 때문에 배가 눌리는 것 같아 노약자석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낌새가 이상해 이어폰을 빼보니 노약자석에 앉은 노인 몇 명이 혀를 차며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김 씨는 “보건소에서 주는 임신부 배지도 꺼내놓고 앉는데 막무가내로 호통치는 이들 때문에 노약자석에 앉는 게 꺼려진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통계청은 올해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가 41만여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저출산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출퇴근길 지하철 등에서 만난 임신부들은 앉을 자리 하나 양보받기 힘든 게 사회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노약자석으로는 모자라 임산부 배려석까지 등장했지만 양쪽 모두 임신부에겐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올해 서울시와 서울메트로 등은 ‘핑크카펫’이라고 이름 붙인 임산부 배려석의 색깔을 분홍으로 바꾸는 작업과 더불어 관련 홍보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하지만 임신 37주째로 매일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두 시간씩을 보낸다는 직장인 이선미 씨(31)는 “핑크카펫을 아예 이용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핑크카펫 앞에 서 있어도 그 자리를 양보 안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씨는 “양보를 기대했는데 받지 못하면 상실감이 더 크다”고 얘기했다. 한모 씨(30)도 “임신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나왔고 핑크카펫 앞에 서지만 한 번도 자리를 양보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27일 오전 한 시간 동안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인근에서 열차를 타고 살펴본 결과 핑크카펫에 앉아 있는 승객 중 임신부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리를 비워두는 경우도 찾기 힘들었다. 성수역에서 서초역으로 가는 한 열차의 여섯 개 칸 12개의 임산부 배려석에는 모두 남성과 주부 등이 앉아 있었다.
종종 자리를 양보받는 일도 있고 임산부 배려석 대신 비어 있는 경우가 많은 노약자석을 이용한다고 얘기하는 임신부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신부는 김 씨처럼 노약자석마저도 불편한 자리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고 하소연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뒤에는 여성들이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함께 해내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 등 다양한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대다수 임신부들이 만원 지하철에서 자리 하나 배려받는 것마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 우리 사회에서 임신부가 얼마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이 육아휴직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임신과 출산으로 불이익을 받는 등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소하지만 눈여겨볼 단면”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임신부에게 사회적으로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지만 사람들의 행동이 변화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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