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연차를 탈탈 털어 칩거에 들어갔다.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로 쏙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감귤 박스를 옆에 끼고 엘라 피츠제럴드 누나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들으며 미뤄뒀던 만화책 몇 권을 읽었다. 여기에 잘 고른 영화 한 편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올해도 난 어김없이 ‘사랑의 블랙홀’을 꺼냈다. 이 영화만큼 이맘때와 잘 어울리는 영화도 없다.
1993년에 나온 이 영화는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던 주인공 ‘필’이 무한정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힌다는 설정이 흥미진진하다. 이 영화를 내가 연말이면 찾게 되는 이유는 필이 무한정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 후회되는 상황을 하나씩 고쳐 간다는 점 때문이다. 대리만족이랄까.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두고 내 인생의 손익계산서를 적어 본다. ‘이불킥’을 수없이 하게 한 부끄러운 순간이 먼저 떠오른다. 용기가 없어 후회를 남긴 일이 뒤를 잇고, 미안한 사람들이 따라온다. 그나마 하길 잘했다고 여겨지는 소소한 성과도 있다. 하지만 올해는 여기가 바닥인가 싶다가도 ‘아, 지하주차장이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내 인성과 능력의 밑바닥을 참 많이도 봤다.
대한민국도 올해는 도대체 어디가 밑바닥일까 싶은 한 해였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국정 농단 사태도 그러하거니와 아이들에게도 혹독한 한 해였다. 지난해 말 인천에서 극심한 학대를 견디다 못해 맨발로 탈출한 아이에서 시작한 잔혹사가 장기 결석자 전수조사를 통해 드러난 엽기적인 사건을 거쳐 대구와 포천에서 발생한 입양 아동 학대사망 사건까지 이어졌다. 후회하는 일, 잘못된 일을 그때로 돌아가 다시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에게 찾아온 타임루프가 내게는 부러움의 대상, 축복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후회를 고쳐 나간 필은 과연 행복해졌을까. 막상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필의 숱한 노력으로 상황은 개선하지만 결국 다시 반복되었다. 특히 한 길거리 노인의 죽음을 막아 보려고 필은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필은 자신이 신이 아닌 이상 한 점 후회가 없는 무오류 삶은 이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노인에게 따뜻한 마지막 하루를 선물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삿짐을 싸며 고등학교 시절 일기를 오랜만에 꺼내 읽게 되었다. 온갖 감정이 폭발하던 당시 나는 어딘가 풀 곳이 없어 일기장을 친구 삼아 마구 쏟아냈다.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고백을 다시 읽자니 민망함도 잠시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 문제로 힘들어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 문제, 가족관계, 물질적인 부분, 게으름과 능력 부족, 건강까지 똑같았다. 상황과 등장인물, 정도는 달라도 올해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와 비슷했다. 반복되는 문제에 맞서 크고 작은 후회와 과오를 주섬주섬 달고도 나는 뚜벅뚜벅 잘도 걸어 왔다.
영화 속 필은 결국 내버려두기로 했다. “내일이나 남은 평생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지금 행복해”라는 고백이 있고서야 그는 영겁의 윤회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며칠 전 2016년은 2017년의 예고편이고 전 세계적 혼란은 더 심화될 거라는 기사를 보았다. 나 또한 내년에도 몇 차례 후회할 짓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이불킥을 더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암울하고 희망 없다 하지 않을 것이다. “체호프는 긴 겨울을 암울하고 희망 없는 계절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라는 필의 고백처럼 나도 그것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후회 없는 삶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영겁이 주어져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하루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그런 2017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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