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장선희]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자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9일 03시 00분


‘프로 아무말러’를 해시태그로 단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프로 아무말러’를 해시태그로 단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장선희 문화부 기자
 “DJ님, 혹시 ‘프로 아무말러’세요?”

 “하하.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편이긴 해요.”

 얼마 전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 방송 일부다. ‘별 소리 다 한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이나 술술 내던지는 DJ를 향해 청취자들은 ‘프로 아무말러’란 신조어로 그의 화법을 장난스럽게 지적했다. 그런데 청취자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꽤 그럴싸했다.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다보면 사람들과 예상 밖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고, 연예인으로서 필요한 창의성까지 나름대로 키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프로 아무말러.’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요즘 신조어다. 남들이 헛소리라며 콧방귀 뀌거나 이상한 놈 취급하며 비웃더라도 상관치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한다. 요즘 TV와 라디오에서도 이런 프로 아무말러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이들은 갑자기 예상 밖의 주제를 꺼내 대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그 엉뚱함으로 사람들을 별안간 웃게 만든다.

 어느 조직이건 회의 때마다 지겹게 하는 게 ‘브레인스토밍’이다. 거창한 단어지만, 아무 생각이나 자유롭게 말해보자는 거다. 이렇게 해도 성에 차는 ‘아무 말’이 안 나오자 ‘랜덤 워드(Random Word)’라는 아이디어 도출법까지 나왔다. 방법은 간단하다. 신문에 볼펜을 떨어뜨리거나 책의 한쪽을 펴 나오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러고는 이 단어를 생뚱맞더라도 조직의 고민이나 과제에 연결시킨다. 백날 “아무 말이나 해봐”라고 해도 기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니 더 아무 말이나 나오도록 고민한 결과다. 이처럼 ‘아무 말’은 개인은 물론이고 조직이 창의적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다.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다는 게 참 슬프더라고요.” 지난해 12월 개봉한 재난 영화 ‘판도라’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원전 폭발’이라는 소재를 다룬 사회비판적 영화를 만들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 역시 지난 대선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해 이념 성향을 분석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블랙리스트라는 흉흉한 소문 탓에 그러지 않으려 해도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게 가장 속상했다”고 전했다.

 새해에도 블랙리스트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명단에 무려 1만 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올랐다는 얘기도 흘러나오니, 한심하면서 만드는 쪽도 참 힘들었겠다 싶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데 영향을 미쳤든 아니든, 적잖은 문화계 종사자들은 그 소문과 존재만으로도 ‘아무 말이나 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는 거다.

 출근해보니 책상에 책 한 권이 올려져 있다. 영화담당 앞으로 전달된 ‘한국영화 역사 속 검열제도’란 신간이다. 책에는 그야말로 아무 말이나 할 수 없었던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사회를 어둡거나 비판적 시각으로 그렸다는 등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검열당한 사례들이 나열돼 있다. 책에서 언급한 검열의 역사는 대략 1980년대에 멈춰 있지만, “남의 가위질보다 눈에 안 보이는 자기 검열을 거쳐 ‘셀프 가위질’을 하던 나 자신이 더 무서웠다”는 게 최근 만난 영화계 인사의 말이다.

 새해엔 영화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다양한 주제를 마음껏 이야기하는 ‘프로 아무말러’들이 다방면에서 많이 보였으면 한다. ‘아무 말’이 허락되는 사회야말로 창의적이고 건강한 사회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
#프로 아무말러#블랙리스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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