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성호]나만의 휘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7일 03시 00분



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나, 덴마크 가고 싶어.”

 얼마 전 난데없이 아내가 던진 말이다. 뜨끔했다. ‘12월이 결혼 15주년인데 벌써 여행 가자는 건가.’ ‘혹시 결혼 10주년 때 어물쩍 넘어간 걸 다시 끄집어내나.’ 짐짓 태연한 척 답했다. “북유럽은 추운데,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게 어때?” 머릿속에서 복잡한 항공료와 호텔비 계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휘게를 느끼려면 덴마크에 가야 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당황했다. “휘게? 북유럽 디자인이 유행이라더니, 그거 뭐 이케아(IKEA·스웨덴 가구업체)처럼 무슨 가구 만드는 회사냐?” 이날 뜬금없이 덴마크로 시작된 부부의 대화는 늘 그렇듯이 아내의 핀잔으로 끝났다.

 휘게(hygge)는 덴마크어다. 딱 맞는 우리말이 마땅치 않지만 굳이 찾는다면 ‘편안함’에 가깝다. 따뜻함 친밀함 안락함도 비슷하다. 좋다, 싫다처럼 감정의 ‘움직임’보다 관계나 상황의 느낌을 말하는 감정의 ‘상태’에 초점을 맞춘 단어다. 사회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들이 최근 주목한 표현 중 하나가 휘게다. 사전 펴내는 영국 출판사 콜린스는 2016년 올해의 단어 3위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덴마크가 전 세계 행복지수 1등(유엔 세계행복보고서)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휘게에서 찾았다.

 휘게가 주목받는 건 의미 때문만이 아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휘게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휘게는 곧 덴마크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나 살기 바쁜데 다른 나라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굳이 알아야 하나’란 사람도 있겠지만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가 참고할 부분이 없지 않다.

 덴마크 사람들은 일상에서 휘게를 찾는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 보내는 과정에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비싼 돈 들여 놀이동산 가거나 외식을 하는 게 아니다. 부모와 자녀가 TV나 컴퓨터,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산책이나 보드게임을 즐긴다. 커피와 녹차 아무거나 상관없다. 단 10분이라도 좋아하는 차 한잔을 여유롭게 마시는 것 자체가 휘게다. 회식 자리에서 고주망태 되지 말고 마음 맞는 직장 동료, 친구와 맥주 한잔 기울이는 것이다. 억지로 모임에 참석해 감정 낭비하며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일상에서 행복 찾기’는 한국에서도 익숙하다. ‘저녁이 있는 삶’ ‘야근 없는 날’이 유행했다. 정부와 정치인, 기업들이 한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도 주변에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건 아이러니를 넘어 비극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전국의 사장님들이 휘게스럽게 생각했다면 과연 이 지경이 됐을까 싶다.

 개인은 어떤가. 많은 사람이 일상 속 행복을 꿈꾸며 조건을 단다. 최소한의 경제력으로 집 한 채와 자가용 유지비, 아이들 학원비 등을 기본으로 꼽는다. 직장 내 안정적 위치와 별 탈 없이 굴러가는 사업체도 슬쩍 조건에 넣는다. 하긴 성공을 위해 불법을 서슴지 않는 사회,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상대방을 짓밟는 사회, ‘부모 잘난 것도 능력’이라며 타인의 일상을 비웃는 사회에서 이 정도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것이다.

 한국은 덴마크가 아니다. 행복지수 58등이 1등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공상과학(SF)이고 판타지다. 어쩌면 한 세기가 지나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휘게를 찾아보려 한다. 돈 대신 약간의 정성과 시간 그리고 넘치는 애정만으로 실현 가능한 휘게 말이다. 냄새난다고 뽀뽀를 거부하는 둘째를 위해 25년을 함께한 담배를 끊고 걸그룹에 환호하는 큰아이를 위해 음원도 찾아 들을까 한다. 이런 소소한 행복이라도 찾아야 2017년 한 해 대한민국에서 버텨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휘게#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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