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무전유죄… “여전히 돈 없고 빽 없으면 서럽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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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엠브레인 모바일 설문조사로 본 국민인식

 《 최근 한국 사회는 기회의 문은 좁아지고 불공정한 경쟁이 만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이런 불공정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표현이 됐다. 거의 30년이 지나도 그의 말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현상을 설문조사를 통해 분석했다. 》
 

1988년 10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벌어진 지강헌 사건 현장. 당시 탈주범인 지강헌과 한의철 안광술 (왼쪽부터)이 인질 고선숙 씨(가운데)를 붙잡고 대치 중인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8년 10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벌어진 지강헌 사건 현장. 당시 탈주범인 지강헌과 한의철 안광술 (왼쪽부터)이 인질 고선숙 씨(가운데)를 붙잡고 대치 중인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지강헌 사건을 다룬 2006년 영화 ‘홀리데이’ 삽입곡)

 눈 온 뒤라 그런가. 요즘 하늘은 참 뿌옇다. 비지스의 ‘홀리데이’라. 참, 묘한 노래다. 당신은 휴일 같다며 멜로디는 이리 애달프니. 설날을 맞은 주부 심정을 읊조린 건가.

 요즘 세상도 우울하긴 ‘도 긴 개 긴’. 시국은 어수선하고 도깨비(tvN 드라마)는 끝나고. 차례상 차리기 버겁도록 물가까지 치솟았다. 진짜 돈 없어 조상님께 죄짓게 생겼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서울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탈주범 지강헌은 세상에 무시무시한 한 방을 날리고 떠났다. 올해로 이 말이 나온 지 30년째. 강산이 3번 바뀐 2017년, 한국 사회는 그의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 돈 없고 ‘빽’ 없으면 서러운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픽=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88년 10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발생한 ‘지강헌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 가정집에서 벌어진 인질극이 TV로 생중계됐을 정도였으니. 당시 탈주범 3명이 자살 혹은 사살이란 참혹한 결과로 끝맺은 ‘지옥의 14시간’(동아일보 1988년 10월 17일자)이었다. 그리고 경찰과 대치하며 들었다는 노래 ‘홀리데이’와 함께 그가 남긴 한마디는 길고 긴 여운을 남겼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용서받기 힘든 범죄자긴 했어도 그들의 항변은 그 나름의 옹호를 받기도 했다. 당시 지강헌은 “어떻게 전경환 형량이 나보다 낮을 수 있나”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556만 원을 훔친 혐의로 17년 형(징역 7년+보호감호 10년)에 처해졌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은 수백억 원을 ‘꿀꺽’하고도 7년을 선고받았고 실제론 2년 정도만 실형을 살았다.

 문제는 당시 공감했던 불평등을 국민은 지금도 느끼고 있단 점이다. 동아일보가 여론조사회사인 엠브레인과 함께 20대 이상 남녀 1000명에게 모바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무려 91%가 한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하는 사회라고 응답했다. 심지어 71.4%는 “매우 그렇다”라고 답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등을 감안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2011년 법률소비자연대 설문조사에서 약 80%가 동의했던 결과와 비교해도 더 나빠졌다.

 게다가 지강헌 사건 당시와의 변화를 묻는 질문엔 ‘당시보다 오히려 나빠졌다’가 35.6%, ‘별 차이 없다’가 58.1%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국정 농단 사태가 정치와 경제,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매우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라며 “지난해 시끌벅적했던 ‘수저 계급론’과도 일맥상통한 결과”라고 말했다.

○ “곳곳에서 암약하는 ‘수많은 최순실’ 몰아낼 때”

 그렇다면 국민은 돈이 죄를 있고 없게 만드는 가장 심각한 분야는 어디라고 여길까. ‘정계’(57.6%)라는 답변이 가장 많아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여전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재계(18.6%) 법조계(17.6%)가 그 뒤를 이었다.

 문항 없이 주관식으로 답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단체)’을 묻는 질문엔 ‘재벌(대기업)’이 24.4%로 지강헌(21.2%)을 근소한 차로 앞섰다. 현 시국의 영향을 받은 응답도 많았다. 최순실(혹은 정유라·15.5%)과 전두환 전 대통령(5.5%), 박근혜 대통령(4.2%) 등의 순서였다.

 지난해 겨우 풀린 미국 메이저리그 ‘염소의 저주’처럼 ‘지강헌의 저주’라도 계속되는 걸까.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훨씬 더 법 집행 등이 공정해졌더라도 결국 국민의 인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문제”라며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등으로 일반 시민에겐 윤리 규범이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권력형 비리가 쏟아져 더 큰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설문에서도 이 같은 인식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 52.2%가 ‘사회지도층과 기득권층의 개선 의지 실종’을 꼽았다.

 씁쓸하다. 그럼 30년 뒤에도 여전히 ‘유전무죄’를 곱씹고 있어야 하나.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이렇게 다독였다. “한국 사회에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많은 최순실이 존재해 왔습니다. 엘리트나 부유층이 존대받지 못하는 건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죠. 하지만 국민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한다고 본다는 건 이제 더는 이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겼다고 봅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그만큼 소중한 첫발을 내디딘 게 아닐까요.”

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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