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머리 자르기 힘든 자폐증 청년도 천사 손 거치면 송중기가 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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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7000명 이발봉사 김수현씨, 장애 시동생 머리 손질하며 시작
손가락 잘릴뻔한 사고에도 꿋꿋 “가위 놓을때되면 편견 사라지길”

30년째 홀몸노인과 장애인에게 이발을 해주고 있는 미용사 김수현 씨가 발달장애인 김성한 씨의 덥수룩한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30년째 홀몸노인과 장애인에게 이발을 해주고 있는 미용사 김수현 씨가 발달장애인 김성한 씨의 덥수룩한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우리 아들 잘생겼네. 한복 챙겨서 어서 할아버지한테 가자.”

 설 연휴를 이틀 앞둔 25일 오전, 말끔히 머리를 깎은 아들 김성한 씨(28)를 보고 엄마는 울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친척들 만날 생각에 들뜬 아들이었지만 오랫동안 이발을 못 해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아들의 눈과 귀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180cm가 넘는 거구에, 장난감을 들고 다니며 고성을 지르는 자폐 아들을 받아주는 미용실은 없었다.

 엄마는 연신 “감사하다”며 미용사 김수현 씨(56·여)의 손을 놓지 않았다. 김 씨는 “송중기 스타일”이라며 흐뭇하게 웃었다.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김 씨는 미용사란 직업보다 ‘가위손 천사’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30년째 7000명이 넘는 발달장애인의 머리를 손질해줬다.

 25일 오전 서울 강동구 ‘해뜨는 양지’ 장애인생활센터의 한 공간은 미용의자에 거울, 미용기구 등이 놓인 김 씨의 ‘간이 미용실’로 바뀌었다. 성한 씨처럼 설을 앞두고 꽃단장을 하려는 발달장애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 씨는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인 자폐인들의 전속 미용사인 셈이다.

 낯선 환경과 소음에 민감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는 자폐성 장애인은 미용실 직원 서너 명이 손발을 붙들어야 겨우 머리 손질을 할 수 있다. 돈을 낸다고 해도 이들을 손님처럼 반기는 미용실이 드문 이유다.

 장애인재활센터 인근에 있는 김 씨의 미용실은 문을 여는 날보다 닫는 날이 더 많다. 미용실 가기 쉽지 않은 장애인과 홀몸노인, 보육원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다듬어주기 위해서다. 김 씨의 선행을 관할 구청에 알린 이웃들 덕에 봉사상만 두 개를 받았다.

 30년 전인 1987년 4월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건 미용실을 열자마자 이발 봉사를 하게 ‘만든’ 사람은 시동생이었다. 한때 대전 자기 동네에서 ‘껌 좀 씹던’ 여고생으로 이름깨나 날리던 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스무 살에 결혼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 줄 알았지만 어둑한 방구석에서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누워 있는 시동생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당시 군 부사관이던 시동생은 원인 모를 희귀병의 여파로 자폐증세를 보인 뒤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었다. 이때 집에 있던 주방가위로 시동생의 머리를 다듬어줬다.

 이 일을 계기로 김 씨는 미용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손수 머리를 손질해주던 시동생은 20여 년 전 가족 곁을 떠났다. 김 씨는 이날 “시동생이 떠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자폐인들 가운데 닮은 사람을 만나면 괜히 눈물이 난다”며 눈가를 훔쳤다.

 김 씨의 손은 어부처럼 거칠고 상처투성이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꿰맨 자국이 선명하다. 바리캉 소리에 놀라 발작을 일으킨 자폐인이 가위를 든 김 씨의 손을 쳤고, 날카로운 미용 가위는 그의 손가락 살결을 갈랐다. 그토록 좋아하는 봉사는 물론이고 미용일도 다시 못 할 뻔한 큰 사고였다. 김 씨는 “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자폐인들을 생각하면 가위를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숨 돌릴 새 없이 진행된 머리 손질은 점심을 넘겨서야 한가해졌다. 4시간 만에 손에서 가위를 내려놓은 김 씨는 손이 저린 듯 한참 주물렀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꺼내 보인 폴더형 휴대전화에는 세상을 떠난 장애인의 가족들이 보낸 감사의 문자메시지로 가득했다.

 우리 사회의 발달장애인은 18만2800여 명. 자폐증이 심할수록 더 외롭게 나이 들어가는 이들은 치장은커녕 사람다운 용모를 갖추기도 쉽지 않다. 10년 전만 해도 김 씨가 장애인재활센터에 간이 미용실을 열면 30명 정도 찾아왔지만 지금은 100명을 쉽게 넘긴다고 한다. 김 씨는 “내가 가위 들 힘이 없어질 때는 편견 없이 장애인을 반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설 소망을 말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자폐증#천사#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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