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0만여 명이 이동하는 설 연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기쁘지만 오히려 설 연휴가 힘든 분도 많습니다. 설 연휴를 맞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그래도 가자
“고향이 대전인데 한 번에 못 가고 구간별로 기차표를 끊었어요.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KTX 표는 매진이지만 서울∼광명, 광명∼천안아산, 천안아산∼대전을 따로 검색하면 빈자리가 있거든요. 자리를 바꿔 앉아야 하는 게 번거롭지만 그래도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게 어디예요.”―양규식 씨(24·대학원생)
“반려견 때문에 카풀로 귀성하기로 했죠. 기차나 버스를 타면 반려견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는데 미리 양해를 구하면 카풀은 그런 걱정이 없거든요. 필요할 때마다 휴게소에도 들를 수 있고, 같은 고향 사람들과 수다 떨면서 즐겁게 갈 수 있는 게 장점이죠. 비용도 기차나 버스를 타는 것보다 덜 드는 편이에요.”―김혜리 씨(30·회사원)
“설날 당일이 아내 출산 예정일이에요. 이번 설은 가지 말까 하다가 기왕이면 어르신들이랑 손자 태어난 거 함께 축하하면 더 뜻깊을 것 같아 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아내는 이미 2주 전에 가서 출산을 준비 중이죠. 그런데 아내가 없는 2주 동안 저도 엄청 편해서 좋은 거예요. 이런 걸 윈윈이라고 하는 걸까요. 사주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데 아이가 음력으로 1월 1일에 태어날지, 12월 31일에 태어날지 지금은 그게 더 신경이 쓰이네요.”―최종록 씨(27·회사원)
“속초가 고향인데 작년 추석 때는 자가용으로 새벽 4시에 서울에서 출발했는데 18시간 걸려 밤 10시에 도착했어요. 국도로 가다가 조금만 막힐 것 같으면 아래로 내려갔더니 충주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강원도와 경상북도 경계까지 가서 다시 동해안 타고 올라왔거든요. 올해도 차 끌고 가야 하는 데 이번에는 정체되더라도 그냥 고속도로로 갈 거예요.”―한성재 씨(27·회사원)
누군가에겐 더 힘든 명절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요. 시댁이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집안인데 아들을 못 낳다 보니 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추석에, 설에 왜 이리 명절이 빨리 돌아오는지…. 저는 명절이 정말 싫어요.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 보낸 명절은 즐겁고 따뜻했는데….”―한모 씨(35·주부)
“시댁에 내려가긴 하는데 걱정이 하나 있어요. 시아주버니 사정이 어려워서 돈을 빌려드렸는데 아직 못 받았거든요. 좀 오래됐지요.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서 즐거워야 하는데 돈 문제가 걸려 있다 보니 명절마다 스트레스예요. 이번 명절은 돈 이야기 없이 조용히 잘 넘어가면 좋겠어요.”―기모 씨(59·주부)
“명절에 근무를 서다 보면 홀몸노인들의 고독사나 자살 신고로 출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평소보다 더 외로움을 크게 느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명절에 이런 신고를 받으면 평소보다 더 가슴이 아프죠.”―김유라 씨(27·마포소방서 소방사)
“한국 설은 중국에서도 춘제라는 명절이에요.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이 많이 그립죠. 시댁에서 일도 해야 하고 고향이 멀기도 해서 화상전화로 가족들 얼굴 보는 걸로 만족하고 있어요. 저 같은 다문화가정 주부에게 한국 명절은 신기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고향 생각이 더 나는 기간이기도 해요.”―천징 씨(38·다문화가정 주부)
“행정고시가 한 달밖에 안 남았어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번 설에도 못 갈 것 같아요.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돈을 보내주셨어요. 올해는 꼭 합격해서 다음 설부턴 제 돈으로 부모님 선물을 사서 고향에 가고 싶어요.”―이윤수 씨(25·행정고시 준비생)
고향은 지금
“조류인플루엔자(AI) 때문에 온 마을이 난리입니다. 명절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전 재산을 걸고 축산업을 하는 농장주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에요. 자식들에게도 전화해서 이번 설에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매년 겨울 AI가 심해 이 지역에선 설을 쇤 지도 오래됐네요.”―정남춘 씨(60·경남 양산시 상북면 AI방역초소 근무자)
“옛날엔 명절 때만 되면 마을잔치도 하고 보름 전부터 굿판도 벌였어요. 하지만 요즘은 명절에도 썰렁하죠.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집이 많은 데다 바쁘다고 명절 몇 주 전에 와서 성묘만 지내는 집들도 있어 정작 명절에는 사람 보기가 힘드네요. 귀성객들이 온다고 해도 워낙 연로하신 분들만 계시다 보니 마을 행사를 기획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박길환 씨(60·전남 장성군 진원리 고산마을 이장)
“지난 추석 땐 휴가를 붙여 전남 해남과 여수로 여행 갔다가 고향 집에는 짧게 들렀어요. 이번 설에는 업무가 많아 여행은 못 하지만 추석엔 동해안 여행을 하는 길에 본가를 들를 예정이에요. 저처럼 명절에 차례만 지내고 여행 다니는 사람을 D턴족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내의 명절 스트레스를 줄여주려고 시작한 건데 하다 보니 저도 좋은 추억 만들 수 있어 좋네요.”―이동욱 씨(35·전자회사 연구원)
“명절마다 양가에 거짓말하고 아내와 여행을 다니는데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찾기가 어렵네요. 쓸 만한 건 이미 다 써먹었고. 죄송하기는 하지만 아이가 생기기 전에 실컷 여행을 다니려고요. 대신 죄송한 마음에 엄청 비싼 선물을 보내 드리고는 있어요. 양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아마 평생 명절에 여행 다닐 수 없을 거예요.”―김모 씨(33·회사원)
이거 알면 좋아요
“경북 상주로 귀성하시는 분들은 자전거박물관이나 국제승마장을 꼭 들러 보세요. 자전거박물관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국제승마장에서는 20% 할인된 가격으로 승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바삐 귀경길에 오르기보단 고향 인근 관광지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가셨으면 좋겠어요.”―여근동 씨(48·경북도 관광진흥과 주무관)
“신문이나 우유를 배달받는 분들은 업체에 전화해 명절 연휴 동안 배달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게 좋습니다. 절도범들이 현관 앞에 쌓인 신문과 우유를 보고 빈집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절도를 막기 위해 필요한 분들에게는 창문을 열면 경보가 울리는 장치를 무료로 설치해주고 있습니다. 집 전화를 착신전환해 놓고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바로 받는 것도 빈집털이를 예방하는 방법이에요.”―한찬수 씨(58·서울 연희파출소 소장)
“역귀성하시는 분들에겐 항공운임을 할인해 드리고 있습니다. 부산∼서울의 경우 성수기 기준 편도 8만100원에서 50% 이상 할인된 3만5100원에 제공하고 있어요. 기차표보다 2만 원 정도 싸고 시간도 2시간 절약할 수 있죠.”―박기령 씨(26·에어부산 경영지원팀 사원)
“설 준비에 필요한 25개 품목을 조사해 보니 무, 버섯, 고기 같은 신선식품은 전통시장이 더 싼 걸로 나타났어요. 반면 햄과 같은 가공식품은 대형 마트가 더 싸게 팔고 있었어요. 가격이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전통시장에서만 장을 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알뜰하게 명절 장을 보려면 한곳에서만 장을 보기보다는 신선식품은 전통시장에서, 가공식품은 대형 마트에서 사는 것이 좋습니다.”―마미영 씨(48·한국소비자원 서비스비교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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