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의 프리킥]“최순실 박근혜 다 지겹다… 좀 먹고살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7일 03시 00분


허문명 논설위원
허문명 논설위원
 집이 헌법재판소 근처라 하루에 최소 두 번은 지난다. 평일에도 경찰버스가 서 있고 사복형사들과 순찰차들도 눈에 많이 띈다. 정문 양쪽엔 1인 시위 두 사람이 마스크를 쓴 채 한쪽엔 ‘탄핵’, 한쪽엔 ‘기각’이라 휘갈겨 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재판소 위쪽은 북촌한옥마을이다.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다. 헌재 앞은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기념촬영 장소였는데 요즘은 관광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흘깃거리며 지나간다. 헌법을 수호하는 사법부 최고 권위기구의 바깥 풍경은 이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민망스럽고 부끄럽고 창피하다.

헌재 앞 선술집 취중민심

 수사도 마무리가 안 됐는데 검찰 공소장만 갖고 심리를 진행해서 서둘러 결론을 내리려는 듯한 박한철 헌재 소장의 견해에 법조계나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검사 출신인 그는 탄핵 인용이라는 예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재판관들에게 무언의 영향을 미치는 매우 부적절한 행위다.

 헌재에서 탄핵 결론이 나면 바로 대선이다. 아침에 눈만 뜨면 너도나도 대선 출마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마당에 ‘부실심리’ ‘날림대선’을 초래할 박 소장의 언급은 매우 부적절하다. 밖이나 안이나 뒤숭숭한 헌재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나라냐, 민주공화국이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헌재 근처엔 현대건설, 감사원이 있고 인사동도 있어서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식당, 선술집들이 많다. 저녁때면 생활인들이 세상사를 터놓고 얘기하며 대화의 꽃을 피우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여기에 앉아 있다 보면 바닥 민심이 훤하게 읽힌다. 두 달 전 촛불시위 초기엔 사람들이 “주말에 ‘광화문 어디’에서 만나자”를 약속하고 촛불 경험담을 주고받았다. 지금은 “나라꼴 잘 돼간다” “최순실, 박근혜 다 지겹다. 이제 좀 먹고 살자”는 이야기 일색이다.

 어제 저녁 이 부근에서 모임이 있었다. 마침 박 대통령의 인터넷TV 인터뷰 방송이 보도되고 있었다. TV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갑자기 한 손님이 “TV 좀 꺼주세요. 정말 짜증나요. 차라리 라디오를 켜주세요” 하자 주인은 재빨리 TV를 꺼버리고 말았다.

 나라가 어수선하지만 생활인들에겐 먹고사는 게 우선이다. 대선은 대선대로 준비하되 정치권은 민생을 최우선에 놓고 장관들이 수시로 연석회의를 열어 민생 현안을 논의하고 격의 없이 협조해서 법안도 통과시키고 정책을 추진했으면 좋겠건만 싹수조차 보이지 않는다.

 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30세 이하 청년실업률은 거의 10%로 10명 중 한 명이 놀고 있다. 자영업도 붕괴하고 있다. 실업은 낙오다. 대오 이탈이다. 우리 사회는 이들의 증오와 분노, 원망과 저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촛불은 물론 태극기 부대에도, 정치권의 막말 살풍경의 저류에도 이들의 한(恨)과 파괴, 저항의 정서가 흐른다. 두렵다. 조마조마하다.

막장 지나 엽기의 시대로

 엽기(獵奇)의 사전적 의미는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을 찾아다님’이다. 사회병리학에 의하면 사회병리가 막장을 지나 끝판에 이르면 엽기가 등장한다. 야당 국회의원은 민주공화국의 심장인 국회에 박 대통령 패러디 그림 전시를 주최하고 박 대통령 극성 지지자들은 해당 의원의 아내와 딸을 인신공격했다. 이것이 엽기가 아니면 무엇인가.

 국가 권위의 추락, 서민층의 몰락, 청년층의 낙오, 지도자 부재, 날림대선… 한국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이 많이 아프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엽기의 시대#헌법재판소#청년실업률#사회병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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