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입구. 40대 여성 A 씨는 ‘박근혜 퇴진’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다 봉변을 당했다. 갑자기 한 남성이 A 씨의 멱살을 잡고 흔든 뒤 피켓을 부수었다. 이 남성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이었다. A 씨는 “나는 시민단체 회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구미시민일 뿐”이라며 황당해했다.
퇴진 반대 시위도 공격 대상이다. 새해 첫날인 지난달 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 도로에서 보수단체 회장 장모 씨를 폭행하고 그의 트럭을 부순 B 씨(24)가 경찰에 붙잡혔다. 장 씨의 트럭에는 ‘대통령님 힘내세요. 탄핵 무효’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지난달 28일 조모 씨(61)는 ‘탄핵 가결 헌재 무효’라고 쓰인 태극기를 들고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 11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달 7일 정원 스님(64)은 “박근혜는 내란 사범”이라고 적은 유서를 남긴 채 분신했다. ‘탄핵 시계’가 빨라지면서 정치적 견해차로 인한 갈등이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특히 갈등 표출이 분신과 투신 등 극단적 양상으로 번지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평화 뒤에 숨은 ‘혐오의 전투’
탄핵 찬반을 둘러싼 구호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후 8시 반경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서울시 직원들과 박사모 회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박사모는 투신해 숨진 조 씨를 기리는 분향소를 광장에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며 서울시와 대치하고 있다. 이날 몸싸움 도중 누군가가 “폭력은 안 되겠지만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린치’를 가할 필요가 있다”란 말도 터져 나왔다.
반대의 목소리 중에도 섬뜩한 표현이 많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늙었으면 민폐 끼치지 말고 곱게 뒤져라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는 사람)들” 등 극단적인 표현과 이를 부추기는 댓글이 매일 수백 건씩 판박이처럼 올라온다. 경기지역의 한 기초의원 지지자 커뮤니티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결사대 모집, 노인들이 애국하는 길은 입수(入水) 신청입니다”라며 고령층을 비꼬는 내용의 글이 게시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의원은 “누군가 분열을 조장하며 이런 글을 올린 것 같다. 강력한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분을 감추지 못했다.
○ 극단과 배제의 정치는 공멸의 길
탄핵 정국과 맞물려 특정 단체와 관련 없는 일반인 중에도 극단적 행동을 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등 자신의 처지를 현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경우다. 지난해 12월 김모 씨(73·엿장수)가 “나도 음주운전으로 처벌받았는데 최순실 사태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화가 난다”며 국회 담장에 불을 질렀다가 31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굴착기 임대업자 정모 씨(45)가 대검찰청 정문으로 굴착기를 끌고 돌진했다.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의견을 가족 친구 등에게 강요하거나 반대로 강요받는 상황도 자주 마주한다. 대학생 김하민 씨(27)는 촛불집회에 나갔다는 이유로 설 연휴 때 예상치 못한 비난을 들었다. 김 씨는 “어떤 친척들은 ‘군중심리 때문에 간 것’ ‘계엄령으로 좌파를 모두 잡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 등 도가 지나치게 나무랐다”며 “건강한 논쟁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예 대화를 중단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극단과 배제의 정치가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의 이념적 가치를 잃지 않고 지키려는 심리가 특정 사람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행태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면 지지층의 극단적 행동을 자제시키기보다 방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개헌과 경제민주화 등 편협한 주제를 벗어나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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