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소들의 침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3일 03시 00분


평안도에서 시작된 구제역의 여파로 서울 지역 쇠고기 값이 폭등했다는 동아일보 1933년 4월 27일자 보도.
평안도에서 시작된 구제역의 여파로 서울 지역 쇠고기 값이 폭등했다는 동아일보 1933년 4월 27일자 보도.
‘창궐하는 구제역은 소뿐 아니라 마침내 돼지에까지 그 마수를 펴게 되었다. 이런 형세로 구제역 종식은 힘들며 방역책도 없는 형편이다.’(동아일보 1933년 4월 8일자)

1933년 3월 평안북도의 한 군에서 발생한 구제역이 확산을 거듭하며 남하했다. 대책이라고는 그저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뿐이었다. 소에 이어 돼지의 전염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해 4월 4일 현재 감염된 소는 844마리. 여기에 돼지 8마리가 추가됐다. 구제역이라는 이름이 그리 익숙지 않은 초창기에 터진 역대 최대급 사태였다.

구제역 소식은 압록강 상류 농가의 41마리에게서 발생한 것이 확인된 3월 23일 시작되었다.

‘구제역은 소의 입과 발에 종기가 나서 먹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는 병인데 사망률은 5%. 법정 전염병이다. 농경기를 앞두고 소를 기둥같이 믿고 있는 농가의 공포와 피해는 대단한 것이다.’(1933년 3월 27일자)

그러던 것이 나흘 사이 병에 걸린 소가 122마리로 늘었다. 그리고 4월에 들어서 돼지로까지 번진 것이었다.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한 예방 강연이 지역 곳곳에서 열렸다. 우사를 청결히 할 것, 소의 이동 금지, 구제역 발생지에 통행하지 말 것…. 구제역 소는 4월 12일이 되자 1500마리를 넘어섰다. 돼지도 12마리로 늘어났다. 숨진 소도 20마리에 이르렀다.

농가는 무엇보다 밭갈이를 못해 큰 타격이었다. 우시장도 열리지 않았다. 소는 농민에게 재산목록 1호이자 노동력의 근간이었다. 쇠고기를 먹고 말고의 문제는 그 다음 일이었다. 일본의 전염병연구소에서 수의학 박사가 사례 연구를 위해 급거 입국했다.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라 했다. 그러는 사이 구제역은 평안북도를 넘어 평안남도로 확산되었다.

‘창궐하는 구제역은 마침내 철통같은 방역선을 돌파하고 17일 평양에까지 침입하였다. 평양에는 6개 목장과 100마리 젖소가 있고 매일 30마리 소가 도살되는데, 구제역의 침입은 평양부민에게 보건위생상 중대 문제다.’(1933년 4월 19일자)

4월 하순에 이르러 평남북의 구제역 소는 도합 2000마리를 넘어섰다. 소의 이동과 매매가 극도로 위축되자 소값이 뛰어올랐다. 서울에서 쇠고기값은 40% 폭등했다. 이 와중에 병든 소와 버려지는 소를 음성 거래하여 폭리를 취하는 일도 생겨났다.

5월이 되어 구제역은 겨우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병든 소의 절반가량은 회복되었다. 구제역의 남하는 황해도 일부에서 멈추고, 우려하던 경기도 침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돼지콜레라가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다. 이리를 벗어났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라고 농가는 다시 신음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다음 해 3월, 평북 지역에서 다시 소 몇 마리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도청 위생과에서 급거 출동했다. 현장조사 결과 구제역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80여 년 전 그때 이후로 오랫동안 대규모 구제역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나라에 21세기 들어 어느 때부터 구제역은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소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난의 생이지만, 요즘이 옛날보다 더 고생이 아닌가 싶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구제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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