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역사교과서 채택은 일선 중고교의 고유 권한
그걸 번복하도록 압박하는 전교조의 행태는 폭거다
전교조 출범도 곧 30년
이젠 룰을 존중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교육권익단체로 돌아갈 때
그런 기대를 하기엔 너무 먼 데까지 가출했나
나는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드는 데 반대한다. 그렇지만 검정 역사 교과서도 좌편향 비판을 받아온 데다, 국론이 양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정과 국정을 모두 허용하되 국정의 도입 시기를 1년 늦춰 새 검정 교과서 사용 시점인 2018년 3월에 맞추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국정과 검정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검정의 문제점이 시정되면 국정을 없애라는 고육책이었다(‘국사교과서, 검정-국정 모두 許하라’·2015년 10월 5일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에 몰리며 교육부가 내놓은 새로운 제안이 공교롭게도 내 의견과 똑같다(물론 그런 제안에 이르게 된 경위는 서로 다르지만). 그런데 나의 또 다른 제안은 여지없이 묵살됐다. 나는 한 학교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교과서를 선정했는데도 부당한 비판이나 시위, 압력 등으로 번복하라고 겁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유경쟁에 대한 테러라고도 했다.
이 주장은 3년 전 교학사 역사 교과서 채택 과정의 학습효과에 따른 것이지만, 이번 국정 역사 교과서 연구학교 신청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또다시 확인했다. 현재 중고교는 5564개(중학교 3219, 고교 2345개). 이 중 1학년에 역사 시간을 편성해 놓고 있어 연구학교를 신청할 수 있는 중학교는 100개, 고교는 1662개다. 그런데 단 한 곳, 경북 경산의 문명고만이 힘든 터널을 빠져나왔다(지정된 후에는 또 어찌 될지). 선호도와 채택률의 왜곡 뒤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조직적 반대가 있었다.
전교조도 이제는, 잘못을 해서 제재를 받을 땐 다윗인 척하다가 남을 몰아세울 때는 골리앗으로 변하는 행태는 그만뒀으면 좋겠다. 전교조의 행동에는 부당한 탄압을 받아왔다고 생각하는 데 따른 피해 보상 의식,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 집단 이기주의에 근거한 결과 중시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1989년 전교조가 출범한 지 곧 30년이 되고, 전교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은 적도 있는 데다, 반전교조 단체까지 생긴 마당에 전교조도 이제는 어리광에서 졸업해야 한다.
첫 번째는 룰을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 채택은 학교의 고유 권한이므로 반대 의사 표시는 좋으나 집회나 전화 등으로 압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전교조에 그럴 권한은 조금도 없다. 룰을 존중하는 선에서 나는 새로운 정권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국정 교과서를 폐기한다 해도 반대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를 비판하는 집단이라면 다른 집단으로부터 역시 비판을 받고 있는 검정 교과서에 대해서도 겸허해야 한다. 또 전교조 인천지부장 출신인 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이 억대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법정 구속되던 9일, 전교조는 사과 성명을 내고 교육감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어야 마땅하다. 이 교육감의 변명은 전교조가 탄핵, 하야, 구속을 요구하는 박 대통령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검정 교과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뜯어보자고, 전교조 출신 교육감의 구속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조직 내부에 없다면 전교조의 앞날은 더욱 암담하다.
셋째는 교육단체, 권익단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교조의 창립선언문은 부조리한 교육환경에 대한 비판과 교사로서의 자성, 학생들에 대한 헌신이 골격이다. 그런데 요즘 전교조는 정치단체, 운동단체로 바뀐 것 같다. 내 말이 고깝다면 전교조가 요즘 내놓고 있는 보도자료, 성명서, 논평, 취재요청, 기자회견 자료들을 훑어보길 바란다. 좋은 정책이 훨씬 더 많이 노출돼야 하고, 그것도 교사 중심이 아니라 학생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례로 요즘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학제 개편이나 4차 산업혁명을 앞둔 교육 환경 변화에 전교조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들 테마는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전교조가 입장을 갖고 있다면 미안하다. 들어본 적이 없어서.
시절 인연으로 전교조의 탄생 전후, 전교조 가입 교사들의 대량 해직과 복직 과정을 직접 취재할 수 있었다. 1993년경 교육부를 담당할 때는 전교조로부터 ‘감사패’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러면 교육부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농담조로 거절한 적도 있다. 그 후에도 내 딴에는 전교조가 초심으로 돌아가 교육개혁의 일익을 담당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에 국정 역사 교과서의 채택을 저지하기 위해 조직의 온 역량을 결집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것을 보며 그런 기대는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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