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종유석의 석회동굴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용식작용 덕분이다. 석회암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녹아내리는 것을 용식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석회암 지형은 대부분 물을 담지 못하고 움푹 파이거나 동굴 형태를 이룬다. 그런데 경북 문경시에 바로 이 석회암토로 이뤄진 습지가 있다.
주인공은 문경시 굴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돌리네(doline) 습지. 슬라브어인 돌리네는 석회암이 용식되며 형성된 접시 모양의 움푹 파인 웅덩이를 이르는 학술 용어다. 물이 고이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여기는 항상 물이 차 있고 여름이면 그 수위가 2m까지 오른다. 물이 잘 투과하지 못하는 점토 성분의 석회암 풍화토가 쌓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지에서 논농사가 가능할 정도다.
석회암 습지는 전국에서 유일하고 특히 돌리네 습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국립환경과학원 최태봉 박사는 “국내 습지는 대부분 생태적 연구 가치가 있는데 지질학적 연구 가치를 가진 습지로는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평가했다. 생태적 가치도 우수하다. 일대에 수달, 담비, 삵 등 6종의 멸종위기 야생 생물이 서식하며 줄, 들통발 등 습지 식물을 포함해 700여 종의 야생 생물이 살고 있다.
환경부는 2011년 ‘생태·경관 우수지역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곳을 발견하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돌리네 습지 발견’이라며 보도자료까지 냈다. 하지만 이후 6년 가까이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습지 보호를 위해 40만 m²가 넘는 사유지를 사들여야 하는 부담이 컸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문경시도 선뜻 손을 못 대고 있던 사이 땅주인들이 습지를 가로지르는 콘크리트길을 낸 것. 습지를 밭으로 개간하기 위해서다. 길 따라 사과밭, 오미자밭이 들어서면서 습지는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다. 지역주민이자 한국습지학회 회원인 지홍기 영남대 교수는 “과수농사는 물을 많이 쓸 뿐 아니라 농약을 많이 치기 때문에 급격한 파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에 문경시가 부랴부랴 나섰다. 환경부에 연락해 도움을 청하고, 3일에는 지역 간담회를 열어 주민과 지주들에게 중요성을 설명하고 땅을 팔라고 요청할 예정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000여 개의 습지가 있지만 41곳만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습지는 수질 정화와 탄소 저장 기능이 있어 지구온난화를 예방하고 자연 보전에 기여한다. 훼손되면 정도에 따라 10년 이상 걸려 회복되기도 하지만 영원히 ‘습지’라는 이름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기억하자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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