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무자 모집 홍보전단… 향토사학자 심정섭씨 동아일보에 공개
일제 징용수법 파악 귀중한 자료로
‘홋카이도(北海道) 탄광은 복지시설이 완비됐고 돈벌이와 살기에 좋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홋카이도 탄광에 끌고 가기 위해 일제가 배포한 홍보전단(삐라)이 발견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백강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이자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74·광주 북구 매곡동)는 홋카이도 조선인 탄광노무자 대모집이라는 삐라를 2일 본보에 공개했다. 삐라는 세로 16.8cm, 가로 24cm 크기다. 모집 장소는 일본 열도 최북단인 홋카이도 소라치군 미카사 산촌에 있는 쇼와광업소 신호로나이 탄광이다.
삐라에는 노무자 임금이 하루 최저 2원50전에서 5원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1원이 현재 10만 원 정도의 가치인 것을 감안하면 고임금이다. 채광 성적에 따라 매달 3원에서 3원15전까지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덧붙였다.
채용자격은 18세부터 45세이며 체격이 건장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비는 전액 회사가 부담하고 식비는 하루에 5전으로 저렴하다고 설명하며 독신자를 위한 기숙사도 운영한다고 소개했다. 계약기간은 2년이며 각종 복지시설을 완비하고 살기에도 좋다고 자화자찬했다. 신청기간은 9월 16일까지이며 희망자는 경쟁률이 높으므로 서둘러 면사무소에 신청하라고 했다.
하지만 전단 내용과 달리 홋카이도 탄광은 참혹했다. 탄광으로 끌려가 혹사당했던 조선인들은 탄광 벽에 ‘배가 고프다’, ‘고향에 가고 싶다’는 처절한 낙서를 남길 정도로 힘들었다. 계약기간 2년 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장기간 노동에 시달렸다.
영하 20∼30도의 강추위와 혹독한 노동, 각종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임금은 강제로 저축됐지만 광복 이후 저금통장은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 2015년에는 홋카이도에서 희생된 조선인 115명의 유골이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심 씨는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도 3배 비싼 임금을 준다는 일제의 거짓말에 속아 탄광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청년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단은 일본어와 한글을 병행해 만들어졌다. 쇼와광업소는 1941년 홋카이도 탄광으로 합병됐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일본 탄광, 군수공장, 비행장 공사 현장 등에 끌고 가기 위해 1940년까지 삐라를 통해 모집하거나 면사무소 직원 및 순사를 동원해 협박하는 방식을 동원했다. 1941년부터는 아예 강제징용으로 끌고 갔다. 심 씨는 “일제가 1940년부터 한글 표기를 금지한 것을 고려하면 전단은 1938∼1939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은 전단이 징용을 위한 거짓홍보물이라고 설명했다. 강제징용을 정당화하거나 조선인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거짓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일제는 거짓 홍보전단으로 조선사람들을 속여 홋카이도 탄광에 끌고 가 참혹한 노동을 시켰다”며 “일제 징용 수법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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