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바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친구는 말했다. “아니, 자기소개서에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태어나 처음 써 보는 ‘자소서’ 앞에서 그 아이는 너무 솔직했다. 성격의 장단점을 쓰라는 질문에 너무 치명적인 단점을 써버린 것이다. ‘저는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습니다.’
80번 넘게 자소서를 써 취업에 성공한 누나는 당장 지우라고 조언했다. 동생은 발끈했다. “아니, 여기서 나의 장단점을 물어봤잖아. 내 단점이 그거니까 사실대로 말해야지.” “너는 게으르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랑 같이 일하고 싶어?” “어…, 아니.” 그제야 동생은 수긍하고, 둘은 밤을 새워 ‘장점’이 될 만한 ‘단점’을 찾아 헤맸다. ‘나는 잘났고/나는 둥글둥글하고/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오늘 밤에는’ ―오은 시인 ‘이력서’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 3월 공채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자소서의 계절이다.
‘○○은행에 입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서술하시오.’ 만약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커서 은행원이 될 줄 알고 미리 준비하는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만 세상이 문과를 이리도 문전박대하니, 정규직이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는 심정으로 50군데 회사에 원서를 넣었고, 여긴 51번째 회사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저의 삶은 ○○은행에 입사하기 위한 여정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우리는 회사형 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부족한 면을 숨기고, 좋은 면을 부각시키며 한 땀 한 땀 써내려간 자소서는 어느덧 자소설(자신을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된 내용이 포함된 자기소개서를 일컫는 말)이 된다.
글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인 언론고시판은 더하다. PD 지망생들의 자소서는 소설을 넘어 한 편의 영화일 때도 있다. “임신이면 어떡해? 전화기 넘어 들리는 친구의 울먹이는 목소리, 23세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임신에 대한 미혼 여성의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1년 뒤, 나는 이 얘길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동아리에서 영화를 만든 이야기를 A는 이렇게 풀어냈다. 평소 도발적인 B는 신나게 ‘썰’을 푼 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그건 면접 때 알려드리죠”라고 마무리 짓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스킬을 써 가며 우리는 인사팀 관계자들을 유혹한다. 수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제발 나를 궁금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쓴 자소서를 나는 꼭 껴안고 나만 봤다. 부끄럽기도 했고,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을 경쟁자라 생각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린 모두 한 배를 탄, 험난한 ‘헬조선’의 구직자라는 동료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한 취업 준비과정이 힘들어서였을까. 모든 창작물은 피드백을 받을수록 더 나아진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달아서였을까. 나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과 서로의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친구들의 자소서에는 생각지도 못한 비밀들이 너무 많이 쓰여 있었다.
술을 먹으면 가족들을 때렸던 아빠. 그런 아빠를 미워했던 날들과 이해하게 된 계기. 그 모든 걸 ‘해당 직무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풀어낸 1500자의 글을 읽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분명 예전에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눈물이 찔끔 났다. 동시에 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PD 하면 정말 잘하겠구나.’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를 발견하고, 위로했다.
부모님의 죽음, 지긋지긋한 가난,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부끄러운 과거까지…. 이건 뭐, 누가 누가 더 힘들게 살았나 대결하는 불운 올림픽이었다. 자소서는 자기를 뽐내는 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불행 속에서도 묘하게 중간중간 자기 자랑이 섞여 있다. 가끔은 처절하게 어필해서 없어 보이기도 하는, 참 이상한 장르의 글이다. 이건 아마 자소서의 ‘톱 3’ 안에 드는 메인 질문 때문인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했나요.’
과거에 어떤 힘든 일이 있었다 한들, 지금 우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너님’들이 우리 같은 인재를 몰라 뵙고, 안 뽑아준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힘듦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물으신다면, 자소서를 쓰는 과정에서 ‘슬픔도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제대로 배웠기에, 다시금 나의 슬픔들을 응시하고, 오래 생각하고, 또 이렇게 글로 써보고 그런답니다. 뭐 언젠간 끝이 있겠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