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구한 이상민 선수와 대형화재 막은 6살 이하은 양의 ABC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일 17시 08분


응급의학의 기초 중 ‘ABC’ 원칙이 있다. Airway(기도 확보), Breathing(인공호흡을 통한 산소 공급), Compression(흉부 압박을 통한 혈액순환)의 머리글자를 땄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는 무엇보다 ‘A’, 즉 기도 확보가 중요하다. 무의식중에 혀가 말려 기도를 막으면 산소 공급이 중단돼 뇌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20세 이하(U20) 한국 축구대표팀과 잠비아의 경기에서는 이 ABC의 모범이라 할 장면이 등장했다. 경기 후반 수비수 정태욱 선수(20·아주대)가 공중 볼을 다투다 상대 선수와 충돌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한눈에 봐도 대형 부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한국 선수들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곧바로 정 선수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동료 수비수 이상민 선수(19·숭실대). 그는 정 선수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혀가 말려들어가는 것을 막고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다른 선수들은 꽉 조이는 테이핑을 풀고 축구화도 벗겨 혈액 순환을 도왔다. 전문 의료인이 아닌 스물 남짓의 어린 선수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능숙하고 기민한 대처였다.

골든타임에 적절한 처치가 이뤄진 덕에 정 선수는 의식을 되찾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의 혀를 끄집어내려던 이상민 선수의 손가락이 퉁퉁 부어오른 모습은 각종 동영상을 통해 전파됐다. 손가락이 절단될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동료를 구한 이상민 선수와 어린 선수들에게 응급구조 교육을 잘 시킨 프로축구연맹은 누리꾼의 찬사를 받고 있다.

2000년 4월 롯데자이언츠 임수혁 선수가 잠실야구장에서 쓰러졌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프로스포츠계의 응급교육이 지금 같지 않았던 당시 임 선수를 보고 동료와 심판들이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뇌사에 빠진 그는 10년간 투병하다 2010년 2월 세상을 떴다.

2월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 때 정확한 대처로 피해를 최소화한 이하은 양(6). 채널A가 단독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양은 부모가 잠시 외출한 사이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현관문부터 닫고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이용해 12층 집에서 탈출했다. 그 긴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민들에게 “불이 났다”고 계속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현관문을 꽉 닫은 덕에 불은 산소 부족으로 집 안에서 저절로 꺼졌다. 이 양은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라고 말해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19세 축구선수와 6세 꼬마 소녀의 사례는 단순히 응급구조 및 안전 조기교육의 중요성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변화가 등장한 지금 모두가 창의적이고 전례 없는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하고 상황을 풀어가려는 데만 급급한 것 같다. 오히려 답은 너무나 기본적이어서 소홀하기 쉬운 일부터 능숙하게 수행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일에는 기초와 우선순위가 있다. 축구팀에서든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먼저 ABC를 알아야 XYZ도 터득할 수 있다. 두 사람으로부터 인생의 ABC를 배웠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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