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삶을 위한 제1 조건은 무엇일까. 1930년대 말 미국 하버드대 입학생 268명의 70여 년 인생을 추적한 조지 베일런트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찾은 해답은 돈이나 권력, 명예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관계’가 한 사람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청년들은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까. 동아일보 2020행복원정대가 20대 청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경쟁적으로 인간관계를 늘리고 있었지만 오프라인에선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호소하며 ‘관태’(관계와 권태의 합성어)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
● 카·페·인 중독의 그늘… SNS친구 수백명, 진짜 친구는 5명뿐
“학교 많이 안 가요. 점심은 그냥 ‘인간사료(건빵)’로 때워요.”
이번 학기부터 ‘자발적 아싸(아웃사이더)’가 되기로 한 대학생 김명민(가명·25) 씨는 1주일에 잘해야 한두 번 학교에 간다. 주로 집에 머물며 식사도 건빵 등으로 때운다. 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연결된 학교 친구는 150여 명이 되지만 언제든 편히 불러낼 만한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개강 파티에도 가보고, 인맥관리 책도 읽어봤지만 인간관계에 영 자신이 없다. 매년 찾아오는 ‘개강 울렁증’이 싫어 김 씨는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고 고립되는 삶을 택했다.
김 씨만의 고민일까. ‘관계 고민’은 다양한 양상으로 청년들의 삶에 침투해 행복을 무너뜨린다. SNS로 수백 명과 순식간에 친구로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청년들은 그런 양적 관계의 팽창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인간관계의 권태기(倦怠期), 청년들은 이를 ‘관태기’라고 부른다.
○ ‘페친’은 100명 이상, 진짜 친구는 4.99명
동아일보 2020행복원정대 취재팀이 여론조사기관 마크로밀 엠브레인과 20∼29세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인간관계와 행복의 관계를 물었더니 대표적인 SNS인 페이스북 친구(페친)가 ‘100명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약 62%를 차지했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몇 명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평균 4.99명이라고 답했다. 페친이 500명이 넘는다고 응답한 상위 그룹조차 진짜 친구는 평균 7.73명에 불과했다. 속마음을 툭 터놓을 수 있는 진짜 친구는 SNS 친구 수의 1.5%에 불과한 셈이다. 절반이 넘는 청년들(55%)은 인간관계 때문에 자주 또는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고 호소했다.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태’(관계와 권태의 합성어)를 겪는 청년도 적지 않았다. 이번 조사에서도 ‘SNS 속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41.4%)거나 ‘더는 온라인에선 친구를 늘리고 싶지 않다’(73.8%)는 답이 많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28)가 이런 경우다. SNS 친구가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인맥 부자’였다. 하지만 온라인과 달리 현실에선 초라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남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이 씨는 “관태를 느껴 친구들과 거리를 두며 ‘잠수’를 탔지만, 편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울감만 커졌다”고 말했다.
최근 혼행(여행) 혼밥(식사) 혼강(수강) 등 홀로 일상을 처리하는 ‘혼족’ 열풍도 SNS의 화려한 관계 이면의 현실에서 고독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관태와 관련이 있다. 이 같은 ‘관계 기피’ 현상이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성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 동성끼리 시간을 보내는 ‘게이트’(게이+데이트), 온라인에서조차 피곤한 관계에 엮이기 싫어 흔적을 지우는 ‘글펑족’(익명으로 게시했다가 삭제하는 사람), 신상이 드러나지 않는 제2의 계정을 뜻하는 ‘세컨드 계정’ 등이 대표적이다.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는 “관계는 행복한 삶을 위해 고려해야 할 상수(常數)”라며 “관태는 힘들고 허무한 인간관계에 대한 회피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 ‘카·페·인’ 속 인맥 경쟁의 그늘
“페이스북은 ‘허세북’, 인스타그램은 ‘자랑스타그램’이라고 비꼰 적이 있어요. 하지만 취업준비생이 되고 보니 SNS 팔로어가 몇 명인지 쓰라는 회사가 있더라고요. 그게 능력이란 말 아닌가요.”(취업준비생 김모 씨·27)
‘카·페·인’(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SNS는 인맥을 과시하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전문가들은 친구 수, 좋아요 개수와 같이 SNS가 게임처럼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숫자가 높은 사람이 ‘승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인맥 관리에 나서고 인간관계가 경쟁으로 치환돼 스트레스를 불러온다는 해석이다.
행복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양보다 질적 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벤틀리대 여성과경제센터의 사바 버하네 연구원은 “3개월에 한번씩 관계를 평가하고, 소모적 인간관계는 과감히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학교와 사회도 입시와 경쟁에 매몰된 청년들에게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를 가르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흔들리는 20대’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0대에 새롭게 집단에서 맺은 관계가 남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관계의 나침반’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청년들 스스로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해 방한한 루이지노 브루니 이탈리아 룸사대 교수는 “혼자서, 혹은 다른 사람과 척을 지면서도 부유할 순 있지만 행복하려면 두 사람 이상과 어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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