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놀던 딸아이(5)를 보던 이미옥 씨(35·여)의 핸드백에서 갑자기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이 씨가 가방에서 꺼낸 건 휴대용 미세먼지 측정기. 20만 원짜리다. 이 씨는 “정부의 미세먼지 예보는 늘 몇 시간 늦는 데다 지역 편차도 심해 직접 샀다”고 말했다. 이 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들에게도 같은 측정기를 사줬다.
이 씨는 서둘러 딸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이어 집이 아닌 자동차 정비업체로 향했다. 자동차 에어컨에 부착하는 필터를 사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용 목적이 달랐다. 승용차가 아니라 거실과 각 방 창문 방충망에 붙이기 위해서다. 이 차량용 필터가 초미세먼지까지 막아준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 씨 가족은 90만 원가량을 들여 미세먼지를 차단해주는 고가 방충망을 거실과 각 방에 설치했다. 부담이 컸지만 원인 모를 인후통과 발열로 입·퇴원을 반복하는 딸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4평(약 13m²) 크기의 딸 방에선 공기청정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100만 원이 넘는 북유럽산 공기청정기였다.
국내 미세먼지 상황이 평범한 일상뿐 아니라 가정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12일 동아일보가 미세먼지해결 시민본부와 함께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둔 서울 경기 지역 10가구를 확인한 결과 3월 한 달 동안 미세먼지 때문에 지출한 비용이 평균 75만 원이었다. 150만 원을 넘게 쓴 가구도 있었다. 올들어 3월까지 미세먼지가 ‘나쁨’ 이상을 기록한 날은 14일이었다.
지출은 공기청정기 구입 등이 전부가 아니다. 실외 활동을 못 하자 키즈카페를 이용하고 환기를 못 해 의류 건조기를 사는 가구도 있었다. 눈이나 호흡기 질환 탓에 병원을 자주 찾아 의료비 지출도 확연히 늘었다. 정모 씨(44)는 “한 달 마스크 구입비만 10만 원이 넘었다”고 말했다. 이모 씨(35·여)는 “아이들은 밖에서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못해 울상이지만 건강 탓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미세먼지가 태아 건강에도 부정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잇따르자 “아예 낳지 않겠다”며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려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올 2월 스톡홀름환경연구소 등은 2010년 태어난 조기 출산아 270만∼340만 명이 미세먼지로 일찍 태어났다고 분석했다. 9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질병에 취약하다. 육아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임신 기간 동안 마스크를 써야 하고 태어난 내 아이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차라리 당분간 아이를 갖지 않을 생각이다”라는 글에 공감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 신동천 교수는 “미세먼지는 앞으로 출산율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적·생활환경 수준에 따라 미세먼지 대응이 극단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이른바 ‘더스트 디바이드(미세먼지 대응격차) 현상도 심각하다. 이날 서울의 한 노인정에서 만난 어르신 5명은 미세먼지를 막을 수 없는 독감용 마스크를 일주일째 사용하고 있었다. 수시로 손님을 만나는 직업군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택배기사 최모 씨(35)는 “마스크를 쓰고 물건을 배달하면 회사로 손님들의 항의가 접수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일부 계층에 마스크 건강보험 혜택을 적용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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