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본산, 서울 중구 충무로의 큰 도로 옆에는 유독 낡은 건물 한 채가 있다. 외벽에 걸려 있는 색색의 차양에서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2012년 약 130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도둑들’에서 마카오 박(김윤석 분)과 웨이 홍(기국서 분) 일당이 와이어 추격전을 벌인 진양상가아파트다. 제작사는 “최동훈 감독이 해당 장면을 홍콩에서 촬영하려다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진양상가아파트 등(이 장면은 근처 대림상가와 인천 개나리아파트 등에서도 촬영)을 확인하면서 국내 촬영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1968년 완공된 높이 17층, 연면적 5만4608m²의 이 쉰 살짜리 주상복합건물의 역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일제강점기 때 이 땅은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공습에 의한 화재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둔 지대)였다. 광복 후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섰다. 1966년 부임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는 게 말이 안 된다”며 판자촌을 철거했다. 이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를 바탕으로 종묘에서 충무로까지 남북으로 길이 1.1km, 너비 1만6278m²의 대지에 8개의 건물(현재 7개)로 구성된 주상복합타운 세운상가를 조성했다. 287채의 진양상가아파트는 이 세운상가군(群)의 남쪽 종점이다.
시작은 화려했다. 국내 최초로 주상복합 구조에 엘리베이터와 양변기, 중앙난방 시스템이 설치된 고급 아파트였다. 전택이, 노경희 부부 등 영화배우나 고위 관료 등이 초기 입주자였다. 옥상에는 헬기 이착륙장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과 설계 변경 등으로 엉망이 된 동선 때문에 얼마 뒤 흉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1976년 서울시는 “주상복합 용도의 건축물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10년도 안 돼 ‘잘못된 선례’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로선 흔치 않은 고층이었기 때문일까. 불행한 사고도 많았다. 1978년 여성 엘리베이터 안내 직원이 실족사했다. 같은 해 20대 남성 회사원이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변심한 애인을 칼로 찌른 뒤 이곳에 와서 투신자살했다. 원래는 미음(ㅁ) 자 형태로 복도 가운데가 뚫린 중정 구조였는데, 1990년대 한 어린이가 추락사한 뒤 복도 층층마다 바닥을 메웠다. 1980년대에는 몇 채가 안가로 쓰였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아파트 시설 자체는 낡았지만 그래도 깔끔한 편이다. 빈집도 거의 없다. 김태형 관리소장은 “주민 중 70대 이상 고령층의 비중이 크고 근처 상가에서 장사하는 분들도 많다”며 “시설이 낡아 불편함도 있지만 수십 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이 꽤 된다”고 말했다. 1∼4층 저층부 상가는 한때 국내 최대 꽃·혼수상가였던 화려한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은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입장료 2000원의 ‘콜라텍’이 성업하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물론 이 건물도 헐릴 뻔했다. 2007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군 건물을 모두 철거해 공원화하고 주변 지역을 전면 재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8개 건물 중 가장 높았던 현대상가는 이때 철거됐다. 하지만 이듬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를 보전한 채 문화와 창업의 요람으로 삼는다는 ‘재생 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덕분에 진양상가아파트도 계속 자리를 지키게 됐다.
하지만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진양상가아파트를 보기는 어려워졌다. 입주자들이 “별 도움이 안 된다”며 촬영 협조를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영화 도둑들이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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