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독립투사가 고문을 당하거나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할 때 자주 등장하는 곳이 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영화 ‘밀정’(2016년)에서도 그랬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서울(경성)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암투와 회유, 교란을 그렸다. 의열단 여성단원 연계순(한지민 역)은 역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된 뒤 “동료들의 이름과 위치를 대라”는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은 그녀의 시신은 달구지에 실려 서대문형무소를 빠져나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역사는 1908년 10월 서대문구 현저동 101에 일제가 지은 경성감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1907년 7개 조의 ‘신협약’을 통해 사법권마저 사실상 가로챘다. 항일 의병과 국권회복운동이 이어지면서 애국지사들을 가둬 둘 곳이 더 필요했다. 경성감옥은 그렇게 생겼다.
일제는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만들어 이를 경성감옥이라고 불렀다. 서대문형무소는 ‘서대문감옥’으로 불리다가 1923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어졌을 때 1600m²였던 규모는 증축과 개축을 거듭해 1930년대에는 5만1200m²로 30배 이상 커졌다. 초기 500명이던 수감 인원은 1919년 3·1운동으로 3000명을 넘겼다. 이들은 사상범으로 불리며 형무소 내에서 노역에 동원돼 군수물품을 만들었다.
서대문형무소는 광복 후에는 경성형무소(1946년), 서울형무소(1950년)로 이름이 바뀌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불렸다.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서울시가 지금의 건물과 터를 매입했다. 이후 서대문독립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해 1992년 8월 15일 제47주년 광복절에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지난달 29일 찾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는 청소년과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람객이 많았다. 시내 중심부에 있고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 가까워서인지 외국인 관람객도 눈에 띄었다.
역사관 내부에는 가시를 가득 박은 상자 안에 사람을 가둬 두는 ‘고문상자’처럼 실제 일제가 사용한 고문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 사본을 4개 벽면에 가득 붙여 놓은 방도 있다. 기록표에는 자신의 수형번호를 들고 찍은 이른바 머그샷과 형무소에 들어온 날짜가 적혀 있다. 1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형장 옆에는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다. ‘통곡의 미루나무’다. 1923년 사형장을 만들 때 일제가 심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 가운데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한스러워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는 광복 이후 반체제 인사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진보당 사건(1958년), 민족일보 사건(1961년) 피의자들이 수감되거나 사형됐다.
한일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 10월 15일. 한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에 앞서 이곳의 순국선열 추모비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70) 전 일본 총리는 당시 현직 총리는 아니었지만 2015년 8월 12일 이곳을 찾아 일본 식민통치를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형무소 곳곳을 돌며 11차례 고개를 숙였고 추모비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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