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서울 강북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의 모둠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하는 일은 무엇이며 어려움은 없는지 등을 질문 받는 게 내 일이었다. 아이들은 묻고 기록하고 동영상 찍는 역할을 나눠 맡아 종합한다고 했다. 어설픈 인터뷰가 끝난 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주고는 무심코 이런 말을 건넸다. “6학년이니 얼마 안 있으면 모두 중학생이 되겠네?” 그러자 대여섯 명의 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강남 아이들은 벌써 ‘수학의 ○○’을 다 뗐다는데….”
한국에서 사교육 부담은 중고교생과 학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들의 영혼까지 짓누른다. 2일 마지막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사교육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는 유력 대선 후보들의 장담에는 이런 상황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교육업계의 진단은 달랐다.
현실 모르는 고입·수능 대안
고교부터 보자. 여러 후보가 외고와 국제고, 자사고(자율형사립고)를 일반고로 바꾸거나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겠다고 공약했다. 최근 외고 경쟁률은 수도권이 거의 1 대 1 수준으로 떨어졌고 지방은 미달이다. 2010학년도부터 영어내신과 인성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게 한 결과다. 한 사교육업체 대표는 “외고, 국제고 시장이 없어진 지 6, 7년 됐다”고 했다. 시도별 자사고의 60% 이상이 집중된 서울은 2015학년도부터 중학 내신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추첨이나 추첨 뒤 면접으로 뽑는다. 결국 바뀐 현실에 확인 도장을 찍겠다는 공약인 셈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절대평가로 하거나 자격고사로 바꾸는 공약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절대평가가 되면 1400명 정도인 수능 전 과목 1등급 인원이 10배로 늘어난다고 사교육업계는 추산한다. 동점자가 쏟아지면 생년월일로 합격자를 가리는 수밖에 없다고 냉소를 보낸다. 지난달 말 전국 38개 대학 입학처장 84%가 ‘2021년 절대평가는 이르다’고 한 설문 결과는 감당 못할 대학의 우려를 잘 보여준다.
자격고사 전환은 1970년대 예비고사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예비고사를 통과한 수험생들만 본고사를 치르게 하자 과외 광풍이 몰아쳤다. ‘과외 망국병’이라는 말이 이때 나왔다. 절대평가든 자격고사든 사교육을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수능을 한 해 두 차례 치른다는 공약은 후보가 고교 실정을 아는지조차 의심하게 한다. 수능은 도입 첫해인 1993년 두 차례 실시했다가 준비하기 벅차다는 불만이 터져 나와 그 뒤 1년에 한 번만 치르고 있다. 옛 교육과학기술부가 ‘2014학년도부터 2회 실시’를 검토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없던 일이 됐다. 30년간 사교육 현장을 지키고 있는 한 입시 컨설팅업체 대표는 이런 공약을 “한마디로 코미디”라고 혹평했다.
취업연계 입시방안 나와야
정부는 중고교에 추첨과 평준화를 도입해 원하는 학생들을 모두 진학시키는 방법으로 입시 과열을 비켜 갔다. 대입은 김영삼 정부 때 ‘5·31 교육개혁’으로 대학 설립을 사실상 자유화해 문턱을 크게 낮췄다. 그 결과 대학생 수가 1990년 104만 명에서 2000년 167만 명으로 60% 넘게 폭증했다. 취업단계에서 극심한 병목현상이 빚어지는 것은 그 후폭풍이다.
‘명문대 입학이 곧 대기업 취업’이라고 믿는 학부모들이 줄잡아 한 해 18조 원 넘는다는 사교육비 지출을 줄일 리 없다. 대학 정원과 일자리 대책,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등을 한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고민하지 않은 사교육 공약이라면 지금껏 실패했던 경로를 되밟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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