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린 남녀공용화장실, 캄캄한 원룸촌… 공포는 변한 게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6일 03시 00분


‘강남역 살인’ 1년… 본보 여기자들 ‘여성 안전 사각지대’ 둘러보니

칸막이 위 뚫린 공용화장실… 어두운 안심귀갓길 14일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에서 본보 위은지 기자가 
공용화장실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왼쪽 사진). 화장실 칸막이 위가 뚫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엿보기’가 가능해 보였다. 같은
 날 찾은 서울 강북구 삼양로 근처의 여성안심귀갓길 바닥 표지는 지워지거나 색이 바래 어두워지면 확인이 쉽지 않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칸막이 위 뚫린 공용화장실… 어두운 안심귀갓길 14일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에서 본보 위은지 기자가 공용화장실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왼쪽 사진). 화장실 칸막이 위가 뚫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엿보기’가 가능해 보였다. 같은 날 찾은 서울 강북구 삼양로 근처의 여성안심귀갓길 바닥 표지는 지워지거나 색이 바래 어두워지면 확인이 쉽지 않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4일 오후 7시경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의 한 3층 건물. 층마다 다양한 식당과 술집이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건물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남녀 공용 화장실은 항상 만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로 앞 소변기에는 한 30대 남성이 서 있었다. 남성 전용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성 전용칸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남성들이 모두 나간 뒤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화장실이 조용해지고 20∼30초가량 지나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20대 여성이었다. 여성은 화장실을 서성이는 기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본 뒤 치마를 휘날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7일로 1년이 된다. 조현병을 앓던 김모 씨(35)가 서울 서초구의 한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 A 씨(당시 23세)를 살해한 이 사건으로 여성 안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본보 여기자 3명은 14일 오후 서울의 공용 화장실, 주택가 여성안심귀갓길, 대학가 원룸촌을 돌아봤다. 여전히 안심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곳이 훨씬 많았다.

○ 강남역 주변 화장실 10곳 중 4곳은 ‘공용’

이날 오후 6시경 서초구의 한 대형 상가건물 1층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이모 씨(25·여)는 남자친구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이 씨가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남자친구는 그 앞을 경계하듯 떠나지 않았다. 이 씨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화장실이 제일 무섭다”며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는 무조건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간다”고 말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서울 서초구와 인근 강남구 일대에는 여전히 공용 화장실이 많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부터 9호선 신논현역 사이에 자리 잡은 3∼5층 상가 건물 50곳의 화장실을 확인했다. 19곳의 화장실이 남녀 공용이었다. 이 중 15곳은 화장실 출입구를 비추는 폐쇄회로(CC)TV도 없었다.

일부 공용 화장실에는 사건 후 비상벨 등을 설치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손을 쓰지 않은 곳도 있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3층짜리 주점 건물은 수년 전부터 공용 화장실을 운영했지만 비상벨이나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 구에서 화장실을 분리형으로 바꾸라는 권고를 담은 공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건물 2층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B 씨(40)는 “화장실을 개조하려면 수백만 원은 들 것”이라며 “굳이 나서서 개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 안심 못할 안심귀갓길

오후 10시 30분경 서울 강북구 도봉로의 ‘여성안심귀갓길’을 돌아보던 기자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250-07-가’라는 똑같은 위치번호를 가진 112신고 위치 게시판이 150m 간격으로 2개 있었다.

신고자의 위치 파악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경찰이 모든 귀갓길에 설치한 이 게시판은 위치별로 ‘가∼하’ 순의 일련번호가 부여돼 있어야 정상이다. 알고 보니 두 번째 게시판 부착 위치는 원래대로라면 ‘250-07-다’ 게시판이 부착돼야 할 자리였다.

심야 시간대에 귀가하는 여성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여성안심귀갓길’은 서울에 500여 곳이 있다. 경찰은 이곳을 집중 순찰지역으로 선정하고 신고 또는 안전에 유용하도록 여러 장치를 해뒀다. 그러나 비상벨이나 바닥 표지 등이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강북구의 다른 안심귀갓길을 찾았다. 경찰서 홈페이지에 경찰과 바로 통화할 수 있는 비상벨이 있다고 안내된 지점에 도착했지만 벨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둘러본 뒤에야 근처 설비업체가 쳐놓은 비닐 가림막에 반쯤 가려진 비상벨을 찾았다. 바닥에 도색된 ‘여성안심귀갓길’ 표지는 대부분 지워져 ‘성안…갓’이라는 글자만 겨우 보였다. 주민 양모 씨(68·여)는 기자에게 “이 길이 안심귀갓길이었냐”고 되물었다.

○ 가로등 불빛 오락가락하는 원룸촌

오후 10시 반경 찾은 서울 성북구 고려대 후문 근처 원룸촌을 지나는 길 100m에는 단 4개의 가로등만 설치돼 있었다. 그나마도 그중 하나는 10초마다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그나마도 원룸 건물 기둥 뒤편은 사각지대였다. 기자가 길을 걷는 사이 건물 틈이나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을 뒤늦게 발견하곤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근처에 사는 박모 씨(22·여)는 “그나마 안전한 기숙사에서 살다 이곳으로 나오니 ‘어디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오후 11시 30분경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 원룸촌을 지나던 정모 씨(22·여)는 기자의 인기척을 느끼자 화들짝 놀랐다. 정 씨는 “최근에 원룸 입구에서 남자친구가 전 여자친구를 때려 숨지게 했다는 기사를 본 뒤로 더 무서움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여성 안전 관련 분야에 대한 정책 우선순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안전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지 않는다면 예산을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안전 예산은 보험’이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은지 wizi@donga.com·김하경·김단비 기자
#여성 안전#사각지대#강남역 살인사건#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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