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코르셋과 맨박스로부터의 탈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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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성은 프리랜서 VJ
정성은 프리랜서 VJ
대학교 3학년 때, 부산국제영화제 자막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나의 업무는 자막보조. 스크린에 자막을 쏘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해 쏘는 건 기계 일이어서, 나는 그 옆을 지키며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게 다였다. 이 일을 자원한 목적은 단 하나, 마음껏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하루에 4편씩,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거의 모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전까진 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성 넘치는 그 많은 영화들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너무하리만큼 천편일률적이었기 때문이다.

앵글에 여성의 뒷모습이 잡힌다. 장소는 밤의 숲속. 인적 드문 곳이다. 그럼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화면 속 그녀는 다음 장면에서 성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될 테니까. 운이 좋으면 도망치기라도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모든 상황은 관객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조성한다. ‘스토리상 꼭 필요한 장면이었을까?’ ‘이런 식의 성폭행 묘사는 정당한가?’ 하는 문제의식이 들기 시작했다. 관객으로서도 의문이 들었다. ‘여성인 나는 왜 영화를 볼 때마다 높은 확률로 이런 공포를 느껴야 하는 걸까?’ 영화에서 시작된 고민이 몇 년 후 일상의 것이 되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1년 전 오늘로 돌아가고 싶다. 가서 강남역에 있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지금 화장실에 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아마 또 다른 그녀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에 가장 많이 적힌 문장이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그녀’를 ‘또 다른 나’로 여기며 슬퍼하는 여성들의 집단적 행동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별적으로 파편화된 경험들이 서로 만나며, 여성 혐오는 더 이상 개인적 고민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담론으로 대두되었다. 공개적인 발언의 장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성들은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제껏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고백했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대하며,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사회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사람들끼리 만나면 날씨 얘기, 정치 얘기 하듯 페미니즘 이야기가 오갔다. 대학교 캠퍼스엔 단톡방 성희롱을 고발하는 내부고발자 남성들의 대자보가 끊임없이 올라왔고, 여성들은 ‘82년생 김지영’을 돌려가며 읽었다. 그렇게 여성들은 코르셋(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을 던지고, 남성들은 맨박스(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로부터 탈피하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은 정확히 강남역 사건 1주년 되는 날이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피해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추모곡으로 바친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이 곡은 지난여름 탄핵의 시초가 된 이화여대 학생들이 총장 대신 마주한 1600명의 경찰들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부른 노래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나 역시 우연히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로서, 오늘도 용기를 낼 것이다.
 
정성은 프리랜서 VJ
#코르셋#맨박스#난 우연히 살아남았다#페미니스트 대통령#강남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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