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의 인턴이었던 정성수 전남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18일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 상황을 떠올리며 “야전병원, 그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증언 모음집인 ‘5·18 10일 간의 야전병원’ 기술에 참여한 정 교수는 이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5월 19일 발포 이후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 교수는 당시 병원 상황에 대해 “아침부터 곤봉에 맞아 구타를 당한 환자들이 오기 시작했고 조금 이따가는 총에…”라며 “(계엄군이)착검을 한 상태였다. 진압하려고 달려들면 시민들이 물러날 거 아닌가? 남자들은 좀 걸음이 빠르고 여학생들은 걸음이 좀 늦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주로 등이 찔려서 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의식이 없는 환자들이 수도 없이 실려 왔다며 “너무 비참했다. 어떤 한 분은 트럭에 자기 부인하고 아기를 싣고 왔더라. 부인이 총에 맞아 죽고 아들이 다친 걸로 기억을 한다”며 “(당시)자기 차를 몰고 담양 처갓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중계선에서 육군 대위가 ‘안 된다. 다시 돌아가라’고 해서 차를 돌려서 막 출발하려는데 뒤에서 그대로 총을 쏴버렸다더라. 철천지원수 대하듯 무차별 사격이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당시 병원까지 공격을 받았었다며 “첫 번째는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하면서 거의 2층 높이로 해서 기관단총 비슷하게 총을 쏘면서 갔다”며 “(그 이유는)모르겠다. 자기들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서 그랬지 않았겠는가라는 좋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했다.
또 “두 번째는 5월 27일 광주가 함락되던 당시 20사단이 들어오면서 우리 병원에 사격을 했다”며 “병실에 폭도들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그 이유였다. 또 우리 의료진이 숙소에서 밖에 창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보고 있었더니 그쪽을 향해 총을 쏘더라. 맞지는 않았지만 유리창이 깨지고 병실로, 숙소 안으로 실탄이 들어왔었다”고 떠올렸다.
정 교수는 당시 전쟁통 같은 끔찍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의 희생과 따뜻한 마음에 전율을 느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광주 외곽이 전부 차단돼 약품 공급이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물량의 수액이 응급실로 내려왔다.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 ‘나는 이제 못 맞겠다. 총 맞아서 오고 다친 시민들 주시라’고 해서 그 수액들이 한꺼번에 다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혈도 문제가 안 됐던 게 시민군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혈액이 부족하다고 방송을 하니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일이 다 끝나고 나니 오히려 피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더라”라며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이게 한마음 한뜻의 힘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정 교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한 폭동’으로 왜곡하는 주장에 대해 “참담할 따름이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아픔도 크지만 그 후에 우리 광주 시민들이 받은 상처가 훨씬 더 크다”고 토로했다.
그는 “광주의 아픔이 광주 시민만의 아픔이 됐다. 우리를 죽인 집단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상황을 오히려 지역주의의 원흉으로 몰아가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갔다”며 “그 당시에 받았던 2차 피해는 실제적으로 1차 피해보다도 훨씬 더 컸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마지막으로 “광주의 큰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지금도 남모르게 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겠나 생각한다. 남의 아픔을 그 사람의 아픔만큼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조금이나마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며 “세월호를 보면서도 그런 것을 많이 느꼈었다. 우리가 남과 같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사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고 올바른 길로 가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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