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10개월 된 김아리(가명) 양의 손을 잡으며 엄마 김가연(가명·31) 씨가 속삭였다. 아리는 좋다는 듯 다리를 흔들며 한 손으로 엄마 검지를 꽉 쥐었다. 아리와 엄마가 기쁨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이다. 11일 경기 안산시 고려대 안산병원에서 만난 아리와 김 씨는 안고 싶어도 안을 수가 없었다. 신생아 중환자실 침대에 누운 아리는 의료기기와 연결된 온갖 튜브로 고정돼 있기 때문. 배는 공기가 차 수박처럼 부풀었고 팔다리는 근육이 발달되지 않아 흐물흐물했다. 김 씨는 “아리가 태어나자마자 상태가 심각해 젖 한 번 못 물려본 게 한스럽다”고 말했다.
아리의 병력은 복잡하다. 아리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다운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태어났을 땐 심장에 각각 지름 0.9cm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다. 생후 5일 만에 위장 수술, 생후 1개월 때 심장 수술, 그 뒤에도 수술을 5번이나 받았다. 아리는 신체적 장애 이외에 ‘사회적 장애’까지 안고 태어났다. 몽골 출신인 부모가 불법 체류자라 미등록 이주아동이란 꼬리표를 달고 세상에 나온 것. 미등록 아동은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아리 가족은 병원비로 약 2억9500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한국인이면 1800만 원만 내면 될 일이다.
○ 병원비 갚으려면 한국 못 떠나
아리 부모는 2008년경 몽골에 있는 다른 두 딸을 잘 키워보려 합법적으로 한국에 왔다. 비자가 만료된 뒤 부부는 몽골로 떠나려 했지만 갑자기 아리가 생겼다. 아리가 다운증후군에 다른 기형도 있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부부는 몽골보다 의료기술이 발전한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부부는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한시 체류 비자를 받아 한국에 머물고 있다. 아리를 돕는 22개 단체의 도움으로 병원비 중 8500만 원은 갚았지만 2억1000만 원이 남았다. 고려대 안산병원 관계자는 “일반 의료수가로 따지면 병원비가 6억 원이 넘지만 외국인노동자센터와의 협약으로 가격이 할인됐다. 그래도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남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하루하루 불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김 씨는 아리의 퇴원을 준비하고 있다.
“병원을 나가면 아리가 죽을까 봐 두려워요. 집에 의료장비도 사놔야 하고, 감염을 막으려면 제가 잘 돌봐야 하는데 일을 어찌해야 할지….”
이주민 지원 단체들은 미등록 자녀의 비싼 병원비를 갚느라 한국을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불법 체류자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이런 악순환을 막고 아동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아이도 출생등록을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아동이 출생 후 즉시 국가에 등록돼야 한다. 한국의 미등록 이주아동도 빨리 출생신고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 단속에 걸릴까 봐 두려운 병원 가는 길
미등록 베트남 근로자 위엔차미(가명·33) 씨는 지난해 여름 돌쟁이 아들 천하이량(가명·2) 군이 갑자기 40도까지 열이 오르고 계속 토하자 공포에 떨었다.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등록 아동이라 고액의 병원비를 부담해야 했다. 병원비야 나중에 갚으면 되지만 엄마는 무엇보다 병원에서 미등록자임이 드러날 게 걱정이었다. 누가 신고해 아이와 생이별을 하게 되면 아픈 아이는 누가 돌볼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사흘이 지나도 고열이 계속되자 엄마는 두려움을 꾹 누르고 아이와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아이가 ‘급성 폐렴’이라고 했다. 사흘 입원비는 90만 원. ‘조금만 늦게 왔으면 아이를 영영 못 볼 뻔했다’는 의사의 말에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날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아이는 감기를 달고 산다.
아들이 아플 때마다 엄마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위장 결혼 이야기에 솔깃해진다.
“한국 남자와 위장 결혼하면 아이가 한국 국적을 갖게 되니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변에서는 남자에게 2000만 원을 주고 결혼한다고 해요. 하지만 수시로 술집 외상값 갚아달라는 가짜 남편의 요구도 들어줘야 한대요.”
미등록 이주아동을 돕는 ‘아시아의 창 어린이집’ 배상윤 원장은 “이런 아이들은 간단한 치료 한 번을 받아도 2만 원 이상씩 든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건강보험 혜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 열악한 환경에 배 속에서부터 아픈 아이들
미등록 이주여성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이 아이들의 건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필리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슬린 양(7)의 몸무게는 또래 평균(23.8kg)에 훨씬 못 미치는 19kg이다. 엄마 마이린 씨(37)는 입이 짧고 늘 기운이 없는 딸을 보며 임신했을 때 근무했던 공장에서 맡은 강한 본드 냄새와 매캐한 먼지를 떠올린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유해한 환경에서 일한 탓에 아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자책한다.
김설이 남양주시 외국인복지센터 팀장은 “유해한 환경에서 안전 장비도 갖추지 않고 장시간 근무하는 미등록 임신부들은 본인과 아이가 모두 위험한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조산이나 유산이 꽤 많이 일어난다”고 전했다.
안산=노지원 zone@donga.com / 남양주=김예윤 / 군포=조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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