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아프지 말자, 아프게 하지는 말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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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묻힌 가정의 달… 병원응급실서 가족을 배우다… 위기 때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국내 1인 가구 비율 27%에 허물어지는 가족의 울타리
공동체 미래설계 다급한데 지금 우리는 ‘청산 과잉시대’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매사 시답잖은 유머에 어이없는 장난을 멈추지 않는 이 남자는 온 가족의 골칫덩어리다. 하나 있는 딸은 괴짜 아빠와 딴판이다. 일에 전력투구하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늘 삐걱거린다. 올해 개봉된 독일영화 ‘토니 에드만’은 가족의 사실적 초상을 그린다. 삶의 방식과 세계관이 너무 다른 부녀를 통해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이 서로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즐거운 나의 집’보다 ‘고장 난 가정’이 더 많이 존재하는 이유다.

문득 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는 특별한 경험을 이 오월에 했기 때문이다. 집안일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 지내면서 다양한 가족의 풍경을 접했다. 응급실은 생사의 갈림길을 둘러싼 의학드라마와 가족을 둘러싼 인간극장이 동시에 펼쳐지는 현장이었다. 한 병상은 ‘노노간병(老老看病)’의 현주소. 뇌중풍으로 쓰러진 88세 노모를 간병하는 아들은 한눈에도 늙고 허약해 보였다. “엄마, 병원 가서 내 약 타 갖고 다시 올게”라고 말하고 간 아들을 노모는 밤새 애타게 찾는다. 맞은편 병상에선 뇌전증을 앓는 30대 아들이 의료진의 만류에도 막무가내 퇴원을 조른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병을 앓은 아들이 직장에서 잘릴까 봐 저런다”며 한숨만 내쉰다.

어느 70대 노인은 보호자 없이 홀로 밤을 보냈다. 아침에 들른 딸은 “병원비는 아버지 카드로 결제할게요”라고 말하고 서둘러 나갔다. 의식 없는 어머니를 향해 울면서 고함치는 늙은 아들도 봤다. “제발 ××, 엄마 좀 일어나봐. 조금만 나랑 더 같이 살자구!!” 병든 어머니 앞에 그는 예전처럼 투정부리는 어린 아들이었다. 이들은 같이 사는 동안 행복했을까. 응급실 밖 복도에선 두 형제가 냉전을 벌였다. 돈의 전쟁. 현금이 없고, 카드는 안 가지고 왔다고 버티다 돌아서는 형의 등을 바라보는 동생.

하버드대 출신 268명의 삶과 인생을 70년간 추적 조사한 책 ‘행복의 조건’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조건이 돈과 권력이 아닌 인간관계라고 결론을 맺는다. 모든 인간관계의 첫 단추는 가족에서 시작할 터다. 내가 하루 경험한 병원 응급실은 생명의 최전선이자 가족의 최전선이었다. 그곳의 밀도 높은 24시는 삶이 참 값지다, 그리고 사랑이 더없이 값지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택시기사 아버지와 아들의 통화를 담은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고.’ 질병이든 재앙이 된듯한 노후든 아무리 준비해도 예측불가 상황을 피할 도리는 없다. ‘아프지 말자’는 장담 못 해도 우리에게 허락된 길이 있다. 그건 ‘아프게 하지는 말자’는 다짐이다.

지금은 마지막 보루였던 가족의 울타리도 허물어져 간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중은 1980년 4.8%에서 2015년 27.2%, 전체 가구의 4분의 1을 넘어섰다. ‘1코노미’(1인+economy)란 합성어도 생겼다. 부모자식이 어우러진 전통적 가족의 구조와 기능의 변화 추세는 거스를 수 없지만 1인 가구 증가 속도는 두렵다. 삶의 고비를 어떻게 넘길 것인지, 가족의 유대든 사회적 연대든 가족구조 재구성에 따른 정책의 틀을 다시 짜야 할 때다. 정부가 만능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를 거시적으로 조정하는 힘은 정부 외에 달리 없다.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정부라면 더 그렇다.

위기상황에서 나를 지켜줄 가족의 결속은 느슨해지는데, 이제부터 준비해도 미래의 길을 찾기 빠듯한데, 새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지난날을 되돌아보느라 바쁘다. 대선 슬로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면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한데 바야흐로 청산과잉의 시대다. 집 안팎 할일은 태산인데 나 몰라라 하며 없는 살림에 식구들만 다그치는 가장과 뭐가 다른가. 왜 우리는 미래가 아니고 늘 과거인가. 왜 자꾸 과거의 되풀이인가. 그 도돌이표의 대가는 대체 언제 또 치를 참인가.

‘가정의 달’에서 ‘정치의 달’이 되어버린 이 오월에 생각해본다, 사회의 파탄은 흔히 개인과 가정의 파탄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 한국사회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인가, ‘응급실 24시’ 같은 일상인가. 당장 발밑 땅이 꺼져가는 것을 공동체가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하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소소한 일상이 ‘사치’로 바뀌는 절박한 순간, 당신은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누구의 곁을 지켜줄 것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청산 과잉시대#위기 때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1인 가구#가정의 달#가족의 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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