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구이면 구이저수지 옆 경각산 아래에 국내 최대 규모의 술박물관인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박영국 관장이 30년 동안 발품을 팔아 모아온 5만5000여 점의 술 관련 유물이 보관 전시돼 있다. 박물관 3층에 재현된 옛 시골 주조장 앞에서 박영국 관장이 술 배달 자전거를 타고 포즈를 취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은 술의 미덕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지었다. 하지만 술을 잘못 마셔 인생 망친 사람도 부지기수다.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모든 약 가운데 으뜸)’으로 불리지만 백해무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만화(萬禍)의 근원(모든 재앙의 뿌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다. 술만큼 얘깃거리가 많고 술처럼 양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 게 있을까.
박영국 씨(61)는 국내에서 술에 관한 한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30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술병에서 술 제조기구, 심지어 술집 영수증까지 술에 관한 모든 것을 모아 왔다.
○ 국내 최대 규모 술 박물관장
전북 전주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0여 분 달리다 보면 오른편으로 호남의 명산 모악산이, 왼편에는 경각산과 구이저수지가 나온다. ‘대한민국 술 테마 박물관’은 산과 저수지 사이 오목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전국의 주류회사나 개인 등이 운영하는 술 박물관 중 크기나 자료 면에서 최대 규모다. 박 씨는 전북 완주군이 운영하는 이 박물관의 관장이다. 이 박물관의 자료 5만5000여 점은 박 씨가 30여 년 동안 발품을 팔아 하나하나 모은 것이다.
경기 수원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80년 초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동네 슈퍼를 하면서 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애주가인 데다 주류대리점 도매상 등으로 사업을 넓히면서 자연스럽게 술에 관한 컬렉션이 시작됐다. 무수한 술이 출시됐다 사라지고 시대별로 술병의 모양과 상표가 바뀌면서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0년대 들어서는 틈만 나면 전국의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았다.
남들 눈에는 쓰레기가 그에게는 보물처럼 보였다. 술병뿐만 아니라 양조장 간판부터 소줏고리, 나무 막걸리 통까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시골 양조장이 문을 닫는다거나 오래된 술집이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찾아가 간판에서 영수증까지 얻어왔다.
“고물상에서 원하던 술병을 찾으면 병 값 대신 하루 이틀 일을 해주고 돌아왔죠. 1000원도 안되는 병따개를 구하러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다 10만 원이 더 든 적도 많죠. 그래도 마냥 좋았어요.”
그렇게 전국의 고물상과 술집에 지인들이 늘어나니 나중에는 그쪽에서 ‘오래된 술병이 나왔다’면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사라질 뻔했던 조선시대 가양주 제조법을 담은 책자나 서류를 찾아냈고, 술에 관한 예법이나 금주령 시기 집에서 술 빚게 해달라는 일종의 청원서인 ‘자가양조허가 소원서’도 발품을 팔아 건졌다. 일제강점기 사기(砂器)로 만든 사케 통을 일본에서 200여 점 사오기도 했다. 국내에서 만들었으나 일본으로 넘어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들이다.
술꾼들의 추억과 흥미를 자극하는 물건도 즐비하다. 당대 유명 영화배우가 나오는 술 포스터와 달력, 새 술 출시와 함께 홍보용으로 뿌려진 공중전화카드도 빠짐없이 모았다. 자료가 늘어가자 2003년 선산이 있는 경기 안성에 술 박물관을 열었다.
박물관이 유명해지면서 술 박물관을 지어주겠다는 기업체의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하고 2010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완주로 내려왔다. 농경과 음식이 발달한 전북이 전통주 분야에 강점이 있고 술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최적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자연 경관과 완주군의 강한 권유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술 박물관은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옛 구이면사무소에서 5년 동안 운영하다 2015년 구이면 덕천리 경각산 아래에 새 건물을 지어 옮겼다. 완주군이 240억 원을 들여 6만3000여 m² 터에 연건평 4300m² 규모로 박물관을 지었고 박 씨가 관장을 맡았다.
○ 술 테마 관광과 축제가 꿈
술테마박물관은 9개 상설전시실과 술집 재현거리, 시음 홍보관을 갖추고 있다. 세계 50여 개 나라 술병 2015개로 만든 술 피라미드와 어른 10여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의 술독, 국내 최대 규모의 양조장 착즙기 등이 눈길을 끈다. 술집 재현거리는 과거 대폿집과 양조장, 호프집 등을 실감나게 보여줘 포토존으로 인기다. 간판에서 술잔까지 모두 박 씨가 수집한 실제 유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분기별로 와인과 소주, 맥주 등에 관한 기획전이 열린다. 7월에는 ‘전북의 명주’ 전시가 예정돼 있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 체험객을 위해 누룩피자와 술 발효 빵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전통주와 와인, 수제맥주 제조법을 강의하고 창업반도 운영한다.
건전한 음주문화 확산을 위해 대학생에게 향음주례 교육도 할 계획이다. 술을 테마로 세대와 국경을 넘어 음식과 예술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관광상품과 축제도 계획하고 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서 입장권을 보여주면 시음 홍보관에서 전국의 전통주 가운데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지난해 박물관을 찾은 사람은 4만여 명에 이른다. 입장료는 2000원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우리 민족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멋이 깃든 술을 담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함께 마셔온 전통이 있습니다. 세상 시름을 잊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데 한잔의 술 만 한 게 또 있을까요.” 술에 관한 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경지에 오른 박 씨의 술 예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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