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텀블러 폭탄’ 사건의 피의자 김모 씨(25·연세대 기계공학과 대학원생)는 4월 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지하철 폭탄 테러를 모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 범행을 결심하기 직전 러시아를 직접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14일 폭발물 사용 혐의로 김 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 씨는 스승이자 피해자인 김모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47)와 최근 논문 작업을 하며 빚어진 갈등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무너진’ 사제 관계에 대한 자조 어린 목소리가 대학가 안팎에서 나온다.
○ 우선 폭발물 사용 혐의 적용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김 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하며 일단 폭발물 사용 혐의만 적용했다. 당초에는 살인미수 혐의 적용도 함께 검토했다. 그러나 폭발물을 이용해 살인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걸 입증하려면 정확한 폭발력 검증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은 텀블러 폭탄의 위험도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조사 중이다. 추가로 혐의를 적용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김 씨는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부상만 입힐 목적이었다”며 부인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지난달 20일을 전후해 범행을 결심했다. 그는 같은 달 13∼22일 러시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4월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폭탄테러 기사를 나중에 접하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폭탄테러로 당시 10여 명이 숨졌다. 이슬람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와 연계된 테러조직이 배후를 자처했다. 이 조직이 사용한 사제 폭탄은 소화기에 쇳조각을 가득 담은 형태의 ‘소화기 폭탄’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자신의 하숙집에서 김 씨가 폭탄을 만드는 데는 20여 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료는 하숙집 인근 문방구 등에서 구했다. 텀블러 폭탄은 범행 3일 전인 10일 완성됐다. 김 씨는 폭탄을 만든 후 실행에 옮기기까지 사흘간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근처 PC방에서 인터넷으로 사제 폭탄 제조법을 검색해 보기는 했지만 따라하지는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인터넷으로 본 사제 폭탄 만드는 방법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재료도 구하기 힘들어 본인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폭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논문 작성 과정에서 갈등
김 씨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 등 범행 과정에서 치밀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범행 당일인 13일 오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제1공학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가 3차원(3D) 프린터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시간에는 연구실에 동료가 있었다. 김 씨는 약 4시간 반 뒤 폭탄을 김 교수의 방문 앞에 두고 나서 연구실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미국 대학(스탠퍼드대) 로고가 찍힌 텀블러를 범행에 사용한 것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치밀한 범행의 배경에는 누적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김 씨로부터 “최근 논문 작성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석·박사 통합과정 7학기째인 김 씨는 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한 수년 동안 불만이 누적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협화음 때문에 불만이 증폭돼 범행까지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김 씨는 주위에 “병역특례업체 전문연구요원이 되려면 영어 성적을 올려야 하는데 교수님이 시킨 일이 많아 어렵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김 씨는 인간관계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학부 시절 동아리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성격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끔 사소한 일에도 심하게 화를 냈다는 얘기도 있다. 친구 A 씨는 “김 씨가 ‘나는 학부 때는 활달했는데 김 교수를 만나고 내성적이고 소심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 ‘어쩌다…’ 술렁이는 대학가
피의자가 지도교수를 노린 대학원생 제자로 밝혀지자 대학가는 술렁이고 있다. 서울의 사립대 심리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교수라는 자리만으로도 존중을 받았다”면서 “지금은 스승으로 존경받으려면 제자에게 취업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야 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반면 쉬는 시간도 별로 없이 지도교수의 지시 아래 연구에만 매달리는 이공계 대학원생의 현실 때문에 벌어진 범죄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공계 박사인 연구원 B 씨는 “연구 성과를 못 낸다 싶으며 더욱 심하게 관리, 더 나아가 감시를 한다”며 “연구 성과와 투자한 시간을 일일이 검사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모욕감을 주는 일도 흔하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사이에서 유독 김 씨에 대한 동정론도 나오고 있다. 과학 전공자들이 즐겨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BRIC·브릭)에는 “대학원 수료하고 뛰쳐나온 지 2년이 지났건만 매일 밤 교수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유서에 교수 원망 글 잔뜩 써 놓고 죽을까도 고민했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저랬을까 싶다” 등 피의자를 옹호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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