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거래 과정 철저히 감춰져… “달러 대신 비트코인 내놔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7일 03시 00분


범죄에 악용되는 가상화폐

#사례 1.

‘○○기업 아들 박○○은 여종업원 폭행한 김○○ 지인. 여자 좋아함….’

지난해 6월 한 포털사이트에 접속한 박모 씨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 사진과 함께 황당한 내용의 글이 게시된 것. 해당 사이트를 살펴보니 ‘제보하기/삭제요청’이라는 링크 안내가 있었다. 급하게 클릭하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떴다. ‘비트코인 지불 시 빠른 삭제 가능합니다.’

가상화폐에 익숙지 않던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일단 홈페이지 운영자 김모 씨(29)에게 삭제 요청 e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도착했다. 내용은 안내문보다 조금 더 친절했지만 비트코인을 요구한 건 마찬가지였다. “비트코인 지불 의사가 있으신가요. 금액은 3BT(Bitcoin), 현 시세로 210만∼220만 원 정도 됩니다.” 김 씨는 “비트코인을 안 보내면 게시글을 안 지우고 다른 글도 추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트코인 전자지갑 주소까지 적어 보냈다.

김 씨는 같은 수법으로 두 달간 박 씨 등 6명을 협박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6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및 공갈미수 혐의로 기소된 김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2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사례 2.

“언니, 조금만 투자해도 반찬 값 정도는 쉽게 벌 것 같아요.”

2년 전 주부 박모 씨(65)는 우연히 친한 동생으로부터 ‘비트코인’을 소개받았다. 가상화폐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제법 돈벌이가 된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후 박 씨는 부산 연제구의 한 사무실에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정모 씨(54) 등 일당은 최근 가치가 급상승한 비트코인 관련 기사를 박 씨에게 보여줬다. 그러면서 “비트코인과 똑같은 가상화폐가 방금 나왔다. 지금 투자하면 6개월 안에 3∼5배는 뛸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투자자를 데려오면 그 사람이 투자한 돈의 10%를 수당으로 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고민하던 박 씨는 우선 150만 원만 투자하기로 했다. 신규 투자가 이뤄질 때마다 계좌엔 차곡차곡 수당이 쌓였다. 통장을 볼 때마다 박 씨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그는 과감히 투자액을 늘렸다. 노후에 대비해 알뜰살뜰 모은 적금과 신용카드 대출까지 받았다. 전체 투자금은 순식간에 7400만 원으로 늘었다.

‘대박’을 꿈꾸던 박 씨는 지금 1년 넘게 찜질방과 자녀 집을 전전하는 ‘쪽박’ 신세가 됐다. 정 씨 일당이 내세운 가상화폐는 비트코인과 비슷하지만 실제 금융거래는 되지 않는 가짜 디지털 가상화폐였다. 부산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가짜 가상화폐를 이용해 6100여 명에게서 611억 원을 가로챈 혐의(사기 등)로 지난달 정 씨 등 9명을 구속하고 30명을 입건해 최근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담당한 박도환 경위는 “최근 불법 유사수신 업계의 테마가 ‘가상화폐’라고 할 만큼 급격히 유행하는 추세”라며 “대규모 적발 이후에도 여전히 범죄로 의심되는 광고 글이 올라오고 피해 접수 사례도 이어져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둠의 경로에서 활개 치는 비트코인

2009년 등장한 온라인 가상화폐 비트코인이 각종 범죄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거래하면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아 수사당국의 자금 추적을 피하기가 쉽기 때문. 비트코인의 ‘몸값’이 오르며 투자 열풍까지 불자 이를 악용하는 범죄도 나오고 있다.

해외에선 일찍부터 비트코인이 마약과 포르노 성범죄 무기매매 등의 범죄 수단으로 사용됐다. 2013년 10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마약과 총기 등의 불법 거래를 비트코인으로 중개한 사이트를 적발해 폐쇄하기도 했다. FBI는 당시 서버에 있던 14만4000비트코인을 몰수해 4차례에 걸쳐 경매에 내놨다.

국내에선 2015년 3월 창원지검이 비트코인을 이용해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마약 10억 원어치를 매입한 일당을 붙잡았다. 비트코인 관련 범죄를 검거한 국내 최초 사례다. 이후 비슷한 범죄가 매년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지방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국제우편을 통해 대마 10kg과 필로폰, 엑스터시 등을 국내에 밀반입한 재미교포 2세 출신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갱단 조직원 3명과 국내 판매총책 13명, 구매자 55명 등 총 71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비트코인을 통해 9억 원 상당의 판매 대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 이영권 경감은 “아직 비트코인 관련 범죄 통계는 따로 집계하지 않지만 최근 추이로 봤을 때 지난해 중반부터 급격히 늘었다”고 말했다.

‘익명성’ 앞세운 은밀한 범죄

범죄자들이 비트코인에 손을 뻗는 가장 큰 이유는 ‘익명성’ 때문. 인터넷 기반으로 개인 대 개인(P2P) 거래로 이뤄지는 비트코인은 계좌 추적이 어렵다. 계좌, 즉 ‘비트코인 지갑’을 개설할 때 주민등록번호나 실명 등 별다른 개인정보를 입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지갑마다 고유번호가 있을 뿐이다. 김승주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 교수는 “범죄는 돈이 오가는 과정에서 경찰이 사건을 인지해 범인을 붙잡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비트코인은 거래 과정에서 익명성이 보장돼 범죄자들이 악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비트코인은 어둠의 경로의 ‘필수 아이템’이 되고 있다. 실제 한 온라인 해외 계정 도박사이트에서 ‘비트코인’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비트코인 송금, 입금 등을 문의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관련 게시물은 ‘딥웹,’ 즉 네이버, 구글 등 전통적인 양식의 포털 엔진으로 검색되지 않으면서 암호화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웹 페이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온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은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암호창을 따로 설치한 뒤 협상이 완료된 금액을 비트코인으로 주고받곤 한다”고 말했다.

국내 공식 비트코인 거래소 ‘코인원’도 비트코인 돈세탁 경고에 나섰다. 코인원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가상화폐 거래소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자금 세탁은 불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라는 팝업창이 뜬다. 김진형 코인원 팀장은 “실제 돈세탁 문의가 많아진 건 아니지만 최근 비트코인이 ‘자금 세탁용’ ‘마약 거래용’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부각돼 캠페인 차원에서 알리고 있다”고 전했다.

비트코인 범죄, ‘블록체인 기술’로 추적 가능

그렇다면 비트코인 범죄는 아예 추적이 불가능할까. 수사 당국 관계자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 단서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이 담긴 블록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거래 장부다. 하나의 블록엔 10분간의 거래 기록이 담긴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비트코인 거래는 익명이 보장되는 대신 참여하는 사람들이 전부 그 거래 기록을 공유할 수 있다”며 “이는 거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또 코빗이나 코인원 등 국내 주요 비트코인 거래소들은 비트코인 주소 발급 시 본인 인증을 거치고 있다. 비트코인을 일반 화폐로 현금화할 경우 입금받는 계좌는 실명이기 때문에 추적이 더 용이해진다. 김 팀장은 “거래소 가입 절차에 실명 인증이 굉장히 까다롭다”며 “현금화 과정에선 익명성이 완벽히 보장된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검 사이버수사과는 올해 4월 ‘범죄 이용 비트코인 거래 추적을 위한 기반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연구 수행업체가 정해지면 올해 11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대검 관계자는 “비트코인 관련 범죄가 늘고 있는 만큼 현재 국내에서 마련한 자체적인 분석틀 외에도 해외 성공 사례 등 다양한 기법의 자료를 참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연 lima@donga.com/부산=강성명·김예윤 기자
#가상화폐#비트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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